
현승의
herworks@naver.com
2019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 석사 졸업
2016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 학사 졸업
개인전
2022 《검정은 침묵의 동의어다》, 오은, 서울
2020 《섬의 그림자》, 이중섭미술관 창작스튜디오, 제주
2019 《Nowhere》, 사이아트도큐먼트, 서울
그룹전
2022 《합의형 수묵》, 해움미술관, 수원
2022 《Hoppy Together》, 에술지구 P, 부산
2022 《씨비전 : 한 사람의 생애》, 빌라해밀톤, 서울
2022 《곶,자왈》, 스페이스나인, 서울
2021 《존재의 위로》, 갤러리비오톱, 제주
2021 《SNU VILLA D'ART》, 예술의전당, 서울
2020 《어디로 무엇으로》, 문화공간항파두리, 제주
2020 《하늘과 바람과 별과 섬》, 이중섭미술관 창작스튜디오, 제주
2020 《잠겨진 기억》, 대안공간금능집, 제주
2019 《서툴고 낯선 이야기》, 오!재미동갤러리, 서울
2019 《추사에게 새로운 길을 묻다》, 제주추사관, 제주
2019 《일본-제주 신화교류전》, 제주문예회관, 제주
2018 《어둠 속에서 몇 개의 그림자가 서성이었다》, ARTXSTAY갤러리, 서울
2018 《그 사이 : 뜰》, 아이디어팩토리, 서울
2017 《미적미적 문질문질》, 관악사ArtDorm, 서울
2017 《시각의 좌표》, 토포하우스, 서울
2016 《ㅁ의 실체》, Space599, 서울
2016 《Cutting Edge 100》, 가나아트갤러리, 서울
레지던시
2022 호랑가시나무창작소, 광주
2020 이중섭미술관 창작스튜디오, 제주
2019 퐁낭아래귤림 아트 레지던시, 제주
2019 Suite Sweet Fish&Rooms 레지던시, 제주
수상
2015 호암교수회관 매입상 수상, 호암교수회관
[전시 설명]
평범한 ■씨의 휴가 The Ordinary ■'s Ordinary Vacation
작가 현승의는 냉소적인 시선으로 바라본 사회의 모습을 밀도 있는 회화로 구현해낸다. 자신이 나고 자란 제주를
작품의 주요한 소재로 삼아 온 작가는 이상화된 제주의 이미지에 감추어져 있는 어두운 면에 주목한다. 제주는
천혜의 아름다움을 지닌 관광지로 각광받지만, 그 이면에는 관광 자본에 의한 무분별한 개발과 생태계 파괴,
환경오염, 역사적인 아픔이 도사리고 있다.
이번 개인전 《평범한 ■씨의 휴가
The Ordinary ■'s Ordinary Vacation
》에서는 가상의 인물 '■씨‘의 휴가를
주제로 삼아 그가 제주 여행에서 누리는 안락하고 낭만적인 의식주 생활을 그려낸다. 제주를 둘러싼 자연 및 사회
문제를 상징하는 이미지를 장식한 과장된 홍보 문구와 조화는 만들어진 관광지로서의 비대화된 낭만과 허황된
속성을 부각시킨다. 이와 함께 나타난 인기 관광지의 전형화된 기념사진, 쉼 없이 섬에 내려앉는 비행기, 수족관 속
쓰레기와 뒤섞인 해양 생물의 모습은 우리가 평범하게 누리는 제주 관광이 무엇을 가리고 있는지, 어떤 대가를 치러
가능하게 된 것인지를 고찰하게 만든다.
[작가-비평가 매칭 프로그램]
평범이라는 재난
- 김지연
사람은 자기 앞에 주어진 시야밖에 보지 못한다. 아는 것 안에서 제한된 행복을 찾는다. 부단히 애를 쓰며 기민하게 굴어야 겨우
눈을 돌릴 수 있다. 평범한 인간의 특성이자 구조의 특성이다.
여행이라고 다르지 않다. 보고 싶은 것은 이미 출발 전부터 정해져 있고, “여행은 이미 시작된 행보를 확인하는 일일 뿐”이다.
윤고은의 소설 『밤의 여행자들』에서 재난여행 전문 여행사의 프로그래머 요나와 여행자들은 거대한 싱크홀과 부족 간의 전쟁이
겹쳐 폐허가 된 인기 여행지 ‘무이'에 간다. 이들이 원하는 생생한 여행지의 풍경은 생생한 피해지역의 이미지다.
관광은 이미지를 소비하는 일이다. 자본주의와 소비문화는 여행객이 편리하게 접근할 수 있는 이미지를 만든다. 우리는 여행
전에 수많은 이미지를 접하며 이미 그곳을 알고 있다고 여긴다. 선행된 이미지를 투사하여 보는 풍경은 현실과 다르다. 이미지라는
벽이 우리의 눈을 가리고 구역을 가르며, 같은 공간 안에 여러 개의 차원을 만든다. 우리는 알기도 하고 모르기도 하고 알면서
모르길 원하기도 한다.
이미지를 여행하는 일
여기 평범한 ■씨가 휴가를 떠났다. 인기 여행지 제주에서 보내는 말 그대로 평범한 며칠이다. 바다 위로 내려앉는 노을이
보이는 안락한 숙소, 제주의 목가적 풍경과 어울리는 로맨틱한 무드의 옷과 소품을 파는 가게들, 마치 해외 휴양지에 온 듯
이국적인 인테리어의 카페와 유럽풍 디저트. 낙원에서 달콤한 꿈에 취할 즈음, 화면의 가장자리에서 부서지고 추방된 것들의 낯선
그림자가 드러난다. 제자리를 되찾기 위해 내지르는 불편한 음성이 들린다.
관광객이 보는 현재의 제주와 과거에 제주라는 지역이 관통해온 역사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그러나 역사는 아직도 이곳에서
이어지고 있다. 천혜의 환경을 가진 아름다운 제주와 무차별 개발에 파괴되며 고통받는 제주는 그저 종이의 앞뒷면이다. 현승의
작가는 제주라는 동일한 공간 안에 흐르는 서로 다른 시간과 경험을 그린다.
평범한 ■씨는 자신이 알고 있는 이미지 속 제주를 본다. 성산일출봉과 정방폭포, 녹차밭처럼 모두가 방문하는 전형적인
관광지에서 출발 전 SNS에서 본 것과 같은 구도로 기념사진을 찍고 해시태그를 붙여 업로드한다. 또 다른 누군가가 이 사진을
보고 제주로 여행을 떠나 동일한 이미지를 생성할 것이다. 하얗게 비어 있는 그림 속 ■씨의 모습은 누구를 넣어도 대체 가능한
‘평범한' 기념사진이다.
우리는 이미지를 소비하며 관광하고, 그렇게 만든 이미지가 다시 누군가에 의해 소비된다. 평범한 ■씨의 여행은, 자연과
누군가의 삶을 연료 삼아 작동하는 거대한 소비의 굴레 속에 편입된다. 우리는 거기 있는 자연을 감상하러 간다고 하지만, 보이는
자연은 실제 자연이 아니고 모든 관광 행위의 이면에는 수많은 사회·경제적 매듭이 연결되어 있다. 자본주의와 소비문화는 그대로
두면 손쓸 수 없을 때까지 부푸는 습성을 지녔다.
그렇게 낙원에 깃발이 꽂히며 점유되어 간다. 멀리 온 듯한 환상을 강화하는 장치들은, 실제로 우리를 현실과 더 멀어지게
만든다. 낙원이 점유되어 버린 것인지, 거기 그대로 있는 자연과 삶을 점유함으로써 낙원으로 이미지화한 것인지 혼란스럽다.
투어리즘이 풍경의 이미지를 소비해왔다면, 오버 투어리즘은 이제 실제 풍경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보이는 것의 이면을 들추어
보겠다고 등장한 것이 다크투어리즘 혹은 블랙투어리즘이지만, 『밤의 여행자들』이 재난여행으로 풍자했듯이 이것 역시 진실을
발견하겠다는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하나의 이미지가 되어가고 있지는 않을까. 보고 싶은 이미지가 다를 뿐 애초에 이미지를
가지고 출발한 여행이라는 점은 같다. 여행의 출발점을 다시 돌아본다.
현승의 작가는 이 모순된 다차원의 풍경을 검은색의 힘으로 그려낸다. 먹의 짙고 축축한 검은색에 건식 재료를 더해 질감과
부피감을 만들고 더욱 풍부한 검정을 연출한다. 짙은 어두움이 깔린 화면은 관광 이미지의 현란한 색을 지우고, 보이는 면과
보이지 않는 면을 동등한 검정으로 그려내며 차원 사이의 경계를 흐린다. 화면을 채우는 위트 있는 상징 이미지들이 언캐니한
블랙 유머를 구성하며, 흐릿해져 가는 경계선 위에 관객을 불러 세운다.
축축하게 덩어리진 검정이 쌓이며 밤이 도래한다. 때로는 어둠 속에서 진실이 더욱 밝게 드러난다. 알랭 바디우가 『검은색』
에서 말한, 경계가 없고 의미와 관점의 무한한 잠재성을 지닌 검은색의 특성이 그림의 더없는 장점이 되는 순간이다.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지, 무엇에 침묵하고 싶은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되물으며, 우리는 검은색 너머로 검은색 이상을 본다.
검은색 너머
재난여행 프로그래머 요나는 우연히 리조트를 벗어났다가 무대의 뒷모습을 목격한다. 재난여행 감성을 충족시키기 위해
구성된 프레임 밖의 삶은 요나가 알던 것과 완전히 달랐다. 게다가 시간이 흘러 재난의 흔적이 흐릿해진 ‘무이'는 인기 여행지의
명맥을 유지하기 위해 새로운 재난 시나리오를 짜고 있었다. 치밀한 계산 속에 열릴 싱크홀 속으로 사람이지만 사람이 아닌
것으로 취급되는 존재들이 빨려 들어갈 예정이었다. 살아있는 것들이 이미지를 위해 봉사해야 한다면, 어디까지가 여행이고
어디서부터 재난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현승의 작가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야자수들은 제주 자생식물이 아니라 이국적 풍경을 조성하기 위한 한때의 장치였다. 그러나
무럭무럭 자라난 야자수들이 태풍을 견디지 못해 쓰러지고 경관을 방해하자, 이제 그들을 몰아내는 것이 경관 관리의 목표가
되었다. 상황은 계속해서 바뀌고 소모 당하는 것들의 위치도 바뀐다. 내가 선 곳이 안전하리라는 보장도 없다.
거대한 횟집 수족관 앞에 질서정연하게 늘어선 야자수들은 감옥의 창살을 닮았다. 창살에 가둬지는 것은 저쪽 편일 수도,
아니면 바라보는 이쪽 편일 수도 있다. 소설 속 요나는 재난 시나리오 설계자에서 이내 싱크홀에 던져질 희생자로 역할이 바뀐다.
관망하던 자는 곧바로 재난의 당사자가 된다. 자연과 인공이 기이하게 뒤섞인 그림 속의 거대한 수족관은, 무엇이든 집어삼키는
소설 속 싱크홀과 다름없다. 이제 우리는 다 같이 싱크홀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평범하다는 말은 안온해 보이지만, 실은 틀 밖을 지워 버리는 소극적 폭력이다. 평범이라는 말 아래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개별성을 지웠고, 평범이라는 말 뒤에서 얼마나 많은 진실을 못 본 척했나. 낯선 불편에 숨이 막혀올 즈음, 서러운 땅에서 온
진득한 검은색이 그림 앞에서 터진 날숨을 묵직하게 끌어당기며 묻는다. 우리는 어디에서 무엇을 밟고 서 있는가,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불편한가,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까지 평범하기만 할 수 있을까. 이어 작가는 ■씨에게 정말 평범하게 행복한지 묻는다. 그
질문은 우리 모두에게, 또한 작가 자신에게도 던지는 질문이다. 우리는 이제 작가가 던진 질문을 안고 틈과 틈 사이를 여행한다.
바디우는 ‘인류의 색은 무색'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어떤 색이 될지는 스스로 결정할 수 있을 테다. 그림 속에 남겨진
단서들처럼, 우리가 경계를 여행하는 한 여전히 희망은 있다. 물론 짙은 검은색 너머에서 발견할 색이 무엇인지 우리는 아직
모른다.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모든 것은 계속해서 전복되며, 우리는 계속해서 검은색 너머를 보아야 한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