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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호미술관

작가소개

정수정 / 2025년 23회

정수정
veinjung@gmail.com

2016    글래스고 예술학교 조형예술학과 석사 졸업

2013    가천대학교 회화과 학사 졸업

 

개인전

2026    하얀색 운동화: 죽음도 좋지만 그러면 사랑이 없잖아, 금호미술관, 서울

2025    Fata Morgana, IAH, 서울

2023    Black Bones, Heart and Gemstones, 에이라운지, 서울

2021    봄 봄 파우더, 에이라운지, 서울

2021    매샤냥 Falconry, SeMA창고, 서울

2020    빌런들의 별, OCI 미술관, 서울

2019    A Homing Fish, 갤러리밈, 서울

2018    Sweet Siren, 레인보우큐브, 서울

 

주요 그룹전

2026    21세기 정물화, 에스더 쉬퍼, 서울

2025    차원확장자, 서울대학교미술관, 서울

2024    Time Lapse, 페이스갤러리 서울, 서울

2023    어쩌면 우리가 보지 않았던 것들, 대전시립미술관, 대전

2023    《히스테리아: 동시대 리얼리즘 회화, 일민미술관, 서울

2023     FOCUS ASIA, 프리즈 서울, 서울

2021    21세기 회화, 하이트컬렉션, 서울

2020    나메, 뮤지엄헤드, 서울

2019    두 번의 똑같은 밤은 없다,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서울

 

주요 수상 및 선정

2026    23회 금호영아티스트 선정, 금호미술관

2020    OCI Young Creatives, OCI 미술관

2020    청년작가 미술대전 최우수상, BNK부산은행

 

레지던시

2024    OCI 1211레지던시, 서울

2023    한국예술종합학교 제8기 창작스튜디오, 서울

[전시 설명]
하얀색 운동화: 죽음도 좋지만, 그러면 사랑이 없잖아
White Sneakers: Death Is Fine, But Then There is No Love

작가 정수정(b. 1990)은 현실의 사건에 기반을 두고 상상해낸 낯설고도 익숙한 세계를 회화에 담는다. 작가는 모험담과 신화, 영화, 다큐멘터리, 애니메이션, 뮤직비디오 등 다양한 서사로부터 수집한 이미지를 해체해 새로운 장면으로 재구성한다. 그의 회화에서는 여성 인물과 자연의 생명체들이 뒤섞여 통제할 수 없는 생명력을 분출하고, 상반되는 에너지들이 충돌하며 역동적인 풍경을 만들어낸다. 고전 회화의 형식과 소재를 적극적으로 차용하는 작가는 17세기 네덜란드에서 유행한 트로니(Tronie)를 변용하여 정체성이 특정되지 않는 보편적인 인물을 제시하고, 서사의 단서만을 남긴다. 강렬한 색채와 밀도 높은 붓질로 채워진 화면 안에서 인물과 배경의 경계는 흐려지고 하나의 의미로 고정되지 않는 열린 이야기로 확장된다.

이번 전시 하얀색 운동화: 죽음도 좋지만, 그러면 사랑이 없잖아는 삶의 역동성과 죽음의 정지성의 대비를 축으로 전개된다. 전시 제목은 레오 카락스의 영화 <홀리 모터스>(2013)에서 차용한 문장으로, 생이 멈춘 이후 지속될 수 없는 감정에 대한 인식은 역설적으로 살아 있는 동안 그것이 지니는 의미를 되돌아보게 한다. 작가는 이러한 사유에서 나아가, 죽음에 관한 개인적 경험과 동시대 사회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교차시켜 삶과 죽음이 맞물리는 장면을 만들어낸다. 전시장 입구의 회화는 인간과 가까운 동물이 죽음을 감지하는 본능적 움직임을 긴장감 있게 드러내고, 일렬로 늘어선 이미지의 단편들이 마치 거대한 이야기의 전조처럼 놓여 있다. 전시의 중심에는 너비가 10미터에 이르는 대형 회화 <하얀 운동화들>(2026)이 자리한다. 인물과 자연의 형상이 서로를 향해 밀려들며 충돌 직전의 긴장 속에 놓여 있고, 화면 곳곳에서는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긴박한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다. 화면 상단에 걸린 하얀색 운동화는 멈춰버린 발걸음을 암시하는 동시에, 떠난 이의 흔적 속에서 남겨진 이가 계속해서 살아가야 할 시간을 환기한다. 이러한 장면은 죽음을 삶의 반대편에 위치시키지 않고, 오히려 우리의 삶 내부에서 작동하는 또 다른 운동성으로 바라보게 한다. 전시는 끝을 알면서도 계속 이어지는 삶의 시간 속에서, 사라진 이후에도 남겨지는 감정과 기억을 되짚도록 만든다.


[작가-비평가 매칭 프로그램]
비평 - ​소녀들에게 바치는, 동세(動勢)로서의 회화: 양효실

  통계에 의하면 12·3 계엄 이후 광장에 모인 시민들 3명 중에 2030 여성들이 한 명을 차지할 만큼 대표성을 가졌다고 한다. 정치적 집회의 당연한 다수로 전제된 4050 남성들은 그 다음으로 집계되었다(2030 남성들의 탈정치화나 우경화는 이 글에서는 논외로 한다). 짱돌이나 화염병을 들던 과거 80년대 운동권 남학생들과, 한결같이 촛불을 들었던 박근혜 퇴진 집회의 시민들과 달리 2024년 이후 광장의 젊은 여성들은 각자가 즐기고 있는 아이돌 응원봉들을 들고 로제의 아파트 같은 노래를 합창했고 혹한의 추위나 폭설을 은박지 담요로 견디며 광장에서 노숙을 했다. 형형색색의 응원봉은 이곳이 분노한 시민 주체보다는 즐기는 여성 대중의 나타남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키세스단은 그저 앉은 자리에서 수동적으로 날씨와 시간의 변화를 감수하는 비정치적 군집의 형상을 현시했다.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을 시작으로 결집한, 젠더 감수성을 각인한 1020 여성들인 영영페미혹은 넷페미10년 후 정권 교체를 위한 좌파 정치의 주도 세력이 되는 사건이기도 했다. 물론 성인 남성들의 엎치락-뒤치락으로서의 현실 정치의 맥락에서 21대 대선과 이재명의 집권은 랑시에르가 말하는 치안(police)으로의 혁명적 시간의 복귀 같은 것이었을 뿐이다. 질서를 유지하고 관리하는 정치적 활동의 귀환 말이다. 가장 오래 광장에 머물렀고 소수자들의 정치(politique)한결같은 목소리로 윤석 파면'을 외치기로 한 광장에서 여성-장애인-퀴어-청소년-노동자-농민으로서의 차이를 강조하며 상황에 맞지 않는 이야기를 하는, 내부의 불화와 불일치를 현시한 담론의 정치안에서 움직였던 이들 젊은 여성들은 정당 정치에서는 합당한 지분을 얻지 못했다. 페미니즘의 의제를 갖고 정권 퇴진의 광장을 점유했던 젊은 여성들의 목적은 놀고 즐기기, 즉 일상적 감각의 재배치, 현실 정치의 일시적 무효화였으므로 이들은 그렇게 다들 어딘가로 사라졌다. “정해진 자리에 맞지 않게 행동하기”(랑시에르)로서의 정치, 예외적 시간으로서의 정치는 그렇게 치안을 교란하면서 치안과 불화하면서 치안을 보좌하면서 나타나고 사라진다.

  이들
, 치안의 장소에서는 몫 없는 자들인 젊은 여성들, 우글거리는 떼(정동)으로 나타나고 사라지는 여성들을 나는 이 글의 맨 앞 문단에 배치했다. 정수정 작가의 개인전 하얀색 운동화: 죽음도 좋지만 그러면 사랑이 없잖아를 위한 비평문의 앞에 그때 그곳의 여성들을 배치한 것은 작가의 초대형 회화, 3.5×10m 크기의 <하얀 운동화> 때문이다. 지금 여기의 여성들을 재현한 것도 아닌, 왜 이렇게 우글우글 모여 있는지 이유가 없는, 맨 발로 공중--바다-들판을 날고 걷고 헤엄치고 달리는 여성들을 보자 남태령이나 한남동의 여자들이 생각난 것인데 이러한 병치-연결-연상은 나만의 특이체질적인 상상력 때문일 수도 있겠다. 작가가 계속 실험 중인 트로니(tronie)” 기법에 의해 장소-지역-인종 등등을 지운 채 바깥을 횡행하는 여성들은 화가 정수정의 몸을 경유해서 물질화-이미지화된 여성들이다. 그럼에도 우글거리는 젊은 여성들”, 맨발로 가고 있고 하고 있는 여성들의 나타남은 우연을 통해, 비동시적 동시성을 통해 재현-의미-목적의 서사 없는 여성들의 유랑-즐김을 제시하면서 정치와 예술, 현실과 구성 사이를 건드리며 어떤 이야기, 발언을 하고 있다는 것은 언급해봄직하다.

  “트로니17세기 네란드 정물화 장르이다. 초상화 장르가 귀족-후원자의 고유한' 인격-정체성을 그의 얼굴-표정, 의상을 통해 재현하는 것과 달리, 글자 그대로는 얼굴/머리/표정을 뜻하고 이후 흉측한 얼굴”, “찡그린 인상”, “낮짝과 같은 부정적인 뉘앙스를 담게 된 트로니는 초상화를 주문할 수 없는 사람들, 가령 젊은이, 늙은이, 군인, 동양 사람, 폴란드 사람, 유대인과 같은 2류 인간들, “익명/누구나로서의 하찮은 사람들의 표정, 감정, 전형(type)을 그리며 초상화를 연구하고 습득하는 화가들의 관행이었다. 트로니 장르에서는 따라서 극적인 과장, 초상화의 잔여로서의 표정이나 의상이 재현 가능했다. 작가는 바로 이러한 트로니 장르를 차용해서 자신의 인물들, 특히 여성들, 소속과 맥락이라는 적절성을 뺀 채로 움직이고 이동하는 여성들을 그려왔다. 신화와 역사, 일상과 이야기, 진짜와 가짜를 넘나들며 작가는 자신의 여성들을 찾아내고 불가능한 장소에서 적절하지 않은 행동을 하도록 연출.

  작가는 이번 전시를 위해 이 대형 회화를 제작한 게 아니라고 했다. 전시 직전까지도 하루 10시간씩 이 거대한 공간에 자신의 인물들, 암컷이라는 분류가 적절한 여성들, 동물들, 벌레들, 식물들을 공간 여기저기에 채워 넣었다. 작년에 입주한 작업실의 한 벽면만한 것을 해보자, 라는 너무나 단순한 생각으로 캔버스를 벽에 고정시켜 놓고 무작정 그렸다고 했다. 이후 전시가 섭외되었고 그렇게 우리는 집중-감상-보기가 불가능한 화면을 만나게 되었다.

  자, 당신은 어디서부터 보기 시작할까? 전후, 좌우로 몸을 움직이면서 위아래로 시선을 움직이면서 그림을 보긴 해야 할 것이다. 탈중심화된 배치, 모든 곳이 똑같이 대우받는 화면 배치이기에, 모든 곳에서 움직임-사건이 대등하게 일어나고 있기에, 수수께끼처럼 아귀가 맞지 않는 디테일들-파편들이 그러나 대단히 정교한 내재성의 원리에 라 배치되어 있기에, 당신과 나는 홀린 듯이 읽고-보고-연결하고-상상하고 있게 될 것이다. 그림은 무엇보다 유혹에 대한, 유혹을 위한 것이다. 그림은 그것을 기다리는 시간을, 퍼즐을 푸는 시간을, 견디고 기대하는 시간을 개방한다. 그림은 안에 메시지나 답, 주장을 갖고 있는 척하면서 그렇게 우리를 시간의 학대로부터 빼낸다, 학대를 잊게 한다. 그림은 맨 앞의 이미지들, 뭔가를 감춘 척 드러내는 척 연기하는 인물/배역들을 내세우고 우리를 붙드는 표면-수수께끼-계략이다. 물론 좋은이미지는 계속 우리의 보기를 교묘히 피하면서 다시 시작하자고 꼬드긴다. 더욱이 정신적 교감을 위한 무채색의 화면이나 무기력을 대우하는 저채도의 화면이 아니면 더더욱 우리는 감각적 흥분 상태에서 표면으로서의 이미지-회화에 매달-걸려들게 된다. 이런 문장은 화가 정수정의 화면, 채도와 대비를 강렬하게 사용하는 회화를 위해 쓰여지고 있다. 더욱이 이 화가의 인물들은 모두 뭔가를 하고 있고 소속-안정을 잃고 떠 있고 떨어지고 있기에, 바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사건, 그러나 이유도 맥락도 부여되지 않은 채이기에 상황만 있는 사건이기에 같고 미로 같고 지진 같고.....

  왼편의 한 떼의 여자들
, 오른쪽 위로 시선을 향한 채 날고 걷고 헤엄치는 여자들, 날개를 단 님프나 반인반수인 비인간들, 새들 사이로 넘어지는, 짐승의 다리를 한 여자들이 있다. 그 옆에는 위에서 거대한 힘으로 아래에 깔린 여자의 목을 조르는 여자와 곧 이 여자의 눈에 흙을 뿌릴 것 같이 손에 흙을 쥐고 있는 깔린 여자의 관계는 이기거나 지는 것에 대한 것이 아닌, 대등한 힘의 동시-상태에 대한 것이기에 나는 좋았다. 여기서는 나누고 분류하는 게 아니라 각자가 가진 힘을 외재화하는 데 필수적인 네가 있어야 하고, 각자가 지금 하는(doing)” 몸들을 가시화하는 게 중요하다. 그러므로 화면 왼쪽의 전자 피아노와 화면 중앙의 곡선 피아노는 이 거대한 회화를 그리는 동안, 작가가 즐겼다는 것을, 오직 화가로서 작가 자신의 힘의-강화(empowerment)만이 기록되는 중이었다는 것을 이미지적으로 반복/보충한다. 만개한 백합을 깔고 앉아 있는맨 왼쪽의 생물학적 남자인 듯 보이는 관망하는인물은 신화(젠더가 충분히 발아되지 못한, 혹은 혼종들을 위한 전()-문화적 세계)에서 막 도착한 것 같아서 꼭 남자는 아닌 것 같고, 화면 맨 오른쪽 하단의 역시 앉아서바느질을 하는 것 같은 노파는 이 세계가 언제-어디서 끝나는 지를 슬쩍 암시하는 맥거핀 같다. 못 본 척 해도 되지만 결국 이 늙은 여자를 보는 순간 이 작가가 자신의 여자들을 지지하면서도 그것을 세대(generation)로서 분류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자궁에서 수정이 일어날 때를 3D 모델링으로 다큐처럼 표현한이미지는 아무런 맥락 없이 화면의 가운데 윗부분에 기괴한 모습으로 떠 있고 제삿상에 놓인 먹을 수 없을 만큼 농익은 수박이 웃겨 보여서 화면 하단에 배치하는 식으로, 작가는 전체(totality)에는 도통 관심이 없고 디테일에, 맥락을 위반하는 과잉에, 그러므로 다른 배치/결합(combination) 위해 떼어내도 좋은 잔여에 강박증적으로 시선을 두는 증상, 그러므로 화가에게는 좋은 증상을 갖고 있다.

  내가 이 글을 쓰겠다고, 즉석에서 미끼를 물었던 것은 화면에 운동화가 나온다는 소식을 들어서였다. “운동화를 신은 소녀들이 질주하는 회화를 나는 어딘가에서 보았고 또 보고 싶었다. 구두를 신기 전, 문화적 여성성을 입기 전, 어디든 가고 뛰어 넘고 질주하는 떼로 움직이는 소녀들과 같이, 정치적 의미를 가질 수 없는 어떤 소수자적 형상을 나는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하얀색 운동화를 대문에 건 개인전이라니! 물론 내가 기대한, 너무나 대항-정치적인 운동화를 신은 소녀-떼는 이번에는 없었다. 작가는 화면의 오른편 절반 정도에 마을 입구에서 마을을 지키는 보호수, 서낭당의 버드나무, 낭창낭창하게 늘어진 가지와 죽은 가지가 혼재하는 늙은 나무를 반녀반목(半女半木)의 형상으로 재현-구성했다. 제 자리에서 나고 자라고 늙는 동안 이 나무는 동네의 모든 이야기, 삶과 죽음을 목격했던 비인간-생명이다. 작가는 이 나무에게도 맨발을 그려줌으로써, 이 화면에서는 어디든 갈 수 있는 이동성을 장착하도록 변형시켰다. 그리고 올려다 본 나무 위에 운동화들이 걸려 있었다. 소녀들이 신은 운동화가 아닌 걸려 있는 운동화! 몇 켤레인지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운동화! 색이나 무늬가 없기에 현실의 운동화는 아닌, 오직 잠재성으로서만 표식된 운동화들! 떼로 걸려 있는 흰 운동화들에서 시선을 맨 아래쪽으로 내려보면 거기 작가의 운동화 한 짝이, 특정해서 반스 체커보드 클래식이라고 불러도 될 운동화 한 짝이 역시 막 발에서 떨어진 듯 그려져 있다. 붉은 색이 묻은이 운동화를 나는 재현적 운동화이자 불길한 욕망을 담지한 주관적 운동화로 읽는다. 그리고 당신은 여기저기를 둘러보며 발견하지 못했을 나무에 걸려 있는 피 묻은 운동화가 있다. 손에서 떨어지는 구형 모토로라 핸드폰 곁에. 작가는 17살의 우리”, 고분고분한 소녀로 훈육한 학교의 학생이었기에 운동화 대신 구두를 신고 다녔던 그때의 우리 중에 가장 예뻤고 가장 환하게 웃었던, “그날급작스럽게 죽어버린 친구라는 사건을 화면의 거기에 기록했다. 애도되지 못한 사건, 들려지지 못한 이야기는 결국 돌아온다는 게 시간의 역설이라면, 18년의 시간이 지난 뒤 그 슬픔이 봉인된 장면에서 풀려났다. 작가는 그 사건을 위해, 혹은 그 사건으로부터, 혹은 그 사건이 작가를 볼모로, 이 거대한 화면을 열고 채우고 어떤 이야기도 제 자리로 돌아가지 않고 떠 있는 방식으로 작업을 진행했다, 작업에 복종했다. “죽음도 좋지만 그러면 사랑이 없잖아라는 개인전의 부제는 항변 같고 회한 같고 설득 같은 모습으로, 대화를 나누는 이쪽 인물의 대사처럼 적혔다. 죽은 친구는 죽지 않는다. 죽은 친구는 결국 사랑이란 단어-이념을 포기할 수 없게 만드는 부재의 자리로서, “몫 없는 자의 몫을 각인하는 회화적 구성의 시작으로, 허공에 걸려 있는 운동화의 한계로, 죽을 수 없는 이미지로 돌아온다.

  이 작가의, movement로는 그 함의가 번역되지 못하는 한자 동세(動勢)로서 존립하는 회화를 나는 소녀들, 그때와 지금 그리고 앞으로의 소녀들에게 바치는 회화라고 적는다. 아직 여자도 남자도 아닌, 어쩌면 남자애들보다 더 극악하고 힘 고 멋대로인 비인간들을 위한 회화 말이다. 아직 충분히 알려지지 않은 이들, 어리고 젊은, 겉보기에는 여자이지만 제대로 보면 위험한 소녀들과 암컷들, 정면을 바라보며 웃고 있는 것 같은 이제는 멸종된 주머니 늑대나 권투 장갑을 끼고 싸우자고 꼬드기는 듯한 멸종위기 종인 오리너구리랑 같은 화면에 배치된 이들 소녀들을 위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