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철규
2019 한남대학교 일반대학원 미술학과 석사 졸업
단체전
[전시 설명]
투사일지 Projection Note
작가 강철규는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실재와 허구가 교차하는 서사적 회화를 선보인다. 그는 내면의 갈등을 특정한
대상과 상황에 투영하여 상징적인 시각 언어로 재구성한다. 이렇게 구축된 화면은 작가의 현재 심리를 반영한 풍경이자,
불안으로부터의 도피처이며, 삶에 대한 의지를 담은 공간으로 작용한다. 초기 작업에서 인물들은 자기혐오와 무력감을
반영하는 듯 점차 소멸하거나 폐허와 같은 공간에 놓여 있었지만, 이후 작업에서는 능동적인 행위자로 변화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이방인'과 ‘포식자'라는 양극화된 모티브를 활용해 존재론적 불안과 이를
극복하려는 심리적 흐름을 탐색한다. 화면 속 동물과 인간이 결합된 괴수 형상은 작가의 분열된 자아를 상징하며, 내면의
갈등과 성찰을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작가-비평가 매칭 프로그램]
비평 - 투사의 변증법(Dialectic of the Agonist/Projection): 신지현
“팽팽한 초록빛 눈알을 번들거리며 내 앞에서 공포는 무럭무럭 자라오른다.”라는 최승자의 오래된 시구(詩句) 를 떠올리며 강철규의 그림을 본다. 예술은 언제나 삶에서 비롯되어 마침내 그 삶으로 회귀한다고 할 때, “투사
일지(Projection Note)”라 명명된 강철규의 그림 역시 내면의 알레고리임을 알아차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이번 개인전은 제목이 지시하는 바를 곧바로 따르며 구성된다. 작가의 말마따나 “극복하려는 나와 넘어서지 못한 나”
사이의 갈등 구조는 ‘이방인'과 ‘포식자'라는 모티브로 구체화된다. 여기에서 ‘나'는 어느 편일까? 묶인 자일까 묶는
자일까? 물린 존재일까 때리는 존재일까? 그의 그림을 살필 때 명심해야 할 것은 언제나 둘이 하나라는 점이다. 욕망과
결핍, 분열과 합일을 반복하며 형성된 내적 긴장감은 미술사 속 도상을 경유하며 기시감 뒤에 몸을 숨긴다. 스스로를
‘아고니스트', 즉 투쟁하는 자라 칭하는 작가는 그림을 통해 내적 갈등을 직면하고 통제한다. 은유로 가득한 강철규의
작업은 일견 실제 삶과는 거리를 두는 듯 보이지만, 기실 자신을 들여다보는 렌즈라 보는 편이 맞다. 미술의 외연을
갖춘 채 내면을 투사하는 그의 작업은 극명하게(〈녹초〉(2025)), 은밀하게(〈아고니스트〉(2025)), 능청스레(〈데우스
엑스 마키나〉(2025)) 왜곡된다.
스튜디오에 방문했을 때 눈앞에 펼쳐진 강철규의 작업 사이에서 그가 말한 투사의 방향을 감지해 보려 했다.
대체로 표류이고 때로는 항해이기도 할 과정 안에서 그는 지금 맴도는 시기일까 나아가는 시기일까, 혹은 그 둘을
오가는 시기일까. 회화가 가져온 역사의 무게를 소화해 내기 위한 기술 연구를 경유하는 동시에 자신을 비추는 과정을
누군가는 침잠이라 할 수도 누군가는 깊이를 갖추는 중이라고도 볼 수 있을 터. 그렇게 작가는 사생을 하듯 심리를
살피고 알레고리를 뒤집어씌워 캔버스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캔버스에 유화라는 가장 전통적인 재료를 손에
쥐고, 예민하게 두드린 붓질로 이미지와 원본 사이의 간극을 최소화하는 방식을 발굴해 나아간다. 원본으로부터 결코
멀어지지 않기 위해 질감이나 광택 등 재료적 특질을 절제한다. 그의 회화에선 불가항력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매체적
한계(혹은 특성)를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이를 넘어보겠다는 완고한 태도가 느껴졌다. 완고함의 근원은 아마도 스스로
품고 있는 불안과 불신을 원동력 삼아, 바둑을 복기하듯 반복적으로 되새기며 ‘연습하는 태도'로 귀결하는 집요함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별도의 드로잉이나 스케치 없이 곧장 캔버스로 투신하는 강철규가 선택한 모뉴멘털 스케일은
어쩌면 그가 그림 앞에서 늘상 느껴온 ‘(심리적) 벽'의 반영 아닐까? 이 또한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작가적 의지의
투사임을 깨닫는다. 그의 그림이 실존적으로 느껴지는 까닭이었으리라.
그림을 살펴보자. 여기로부터 먼, 혹은 눈을 감아야 비로소 보이는 시공을 건너 펼쳐진 세계다. 그곳이
은유하는 사냥과 투쟁은 그가 작업에서 초기부터 지속적으로 다뤄온 소재이다. 사냥이라는 행위는 표면적으로 포식자와 피식자의 관계를 전제하지만 여기에서의 경우 자기 내부에서 벌어지는 욕망과 불안의 투쟁, 과시와 번뇌의
현현에 가까울 것이다. 가만 살피면 사냥의 주체와 대상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은 채 피아(彼我)가 끊임없이 전환되는
풍경임을 이내 알아차리게 된다. 근래 들어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사냥물의 변화이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2025)를
보면 새, 토끼 등 소동물을 사냥하던 기존의 습성은 이제 물소, 곰, 사슴 등 몸집이 크거나 공격적인 혹은 떼로 움직이는
동물로 옮겨갔다. 좀 더 과감해진 걸까? 기세로 밀고 나오기로 작정한 것일까? 아니면 이제야 본모습을 드러내는
것일까? 스치는 여러 질문 사이로 제목이 눈에 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그리스 연극에서 쓰이는 무대 기법
용어로, 기계 장치를 이용해 무대에 갑자기 신을 등장시켜 복잡하고 위급한 문제를 해결하는 상황을 의미한다. 논리나
이성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갑작스러운 변화와 전개로 구성된 이 작업은 〈어떤 무모함〉(2024), 〈겁도 없이〉(2024),
〈이방인과 포식자〉(2025), 〈뿔날개〉(2025) 등 벌목과 야영, 사냥 등을 통해 침잠과 방랑의 방향으로 수렴해 온
강철규의 세계에 또 다른 국면이 도래했음을 드러낸다. 세계란 불가해한 것이어서 우연과 운명, 사고와 의도가 모여
방향을 트고 변곡점을 만든다. 짐작건대, 이 불가해함을 이해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그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는
오래된 단어를 애써 소환하였을 것이다. 한편 그의 그림들에서 눈여겨 볼 또 다른 것은 작업 초기부터 등장해 온 ‘검은
구(球)'이다. 이번 전시 출품작 〈아고니스트〉(2025), 〈아이디어 괴물〉(2024)에서도 반인반구(球)의 모습이 보인다.
검은 구는 대체로 머리, 다리, 발 등 인간 신체 일부를 대신하거나(〈Compulsion〉(2023)) 대치하고(〈Enemy〉(2023))
짓눌러왔다(〈Alaska dream〉(2023)). 무게를 가늠하기 어려운 이 덩어리에 종속되어 분투하는 모습은 으레 현대적
시시포스(Sisyphus)를 떠올리게 만든다. 아마 구에 의해 자유를 구속당한 존재로서, 주체성을 잃고 실존의 무게를
감당하는 인간 (혹은 자신)의 초상을 은유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강철규의 세계 안에서 적대적으로
보이는 모든 것들이 결국엔 하나로 귀결되어 왔듯, 이 구 역시 마냥 족쇄만은 아니다. 2022년 작 〈A buoy〉가 보여준
‘중심 잡기' 이후 이번 신작 〈아이디어 괴물〉에선 구가 몸의 중심을 단단히 받쳐주는 새로운 모습이 포착되기 때문이다.
그의 세계에 일어난 고무적인 변화를 감지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단서라 하겠다.
강철규의 그림은 인간 존재가 지닌 유약하고 어리석은 구석을 회화 매체와 양식이 갖는 완고함에 투영하고,
그 끝에 도출되는 일말의 아름다움에 기댄다. 그것이 끝내 벗어날 수 없는 실존적 사유의 굴레를 인지하고, 삶의 모순과
긴장을 끄집어내는 투쟁의 여정이라 한다면 그는 기꺼이 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증언한다. 짐작건대 그가 이토록
그림에 매진하는 이유는, 오직 그것만이 자신과 삶을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방편이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 그의 그림
앞에 서면 늘 불안과 욕망 사이에서 흔들리는 인간 존재를, 저마다의 초상을 자연스레 마주하게 된다. 이 글의 서두에서
인용한 시의 제목이 “호모 사피엔스의 밤” 이었음을 새삼 떠올리게 되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