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금호미술관

전시안내

Clumsy Seamless

서문

Clumsy Seamless
(글. 이지언)

고백컨데, ( )은/는 어설프다.

괄호를 채울 주어는 글을 읽는 사람의 추측과 상상에 맡기려 한다. ( )에 ‘나'를 먼저 써넣는다. 나는 완전히 솔직해지는 데 서투르고, 언어와 사고와 생각들로 온종일 씨름1)한다. 머릿속을 적절하게 출력할 말을 더듬고, 용감한 척하지만 나보다 능수능란하게 살아내는 모든 것들을 질투했다. 그리고, 매끄럽고 유려하게 완료된 문장과 몸, 단정한 매무새와 낙관적이고 효율적인 전망을 열렬히 추종하며, 요철이나 이음새를 의도적으로 소략하고는 했다. 모순적으로, 내가 유지하던 태도와 달리 내 주머니에는 탈락해 나부끼는 순서들, 가냘파서 아슬아슬하게 이어진 끈, 이렇다 할 수 없는 불분명한 시차, 침참하다 귀를 때리며 솟아오르는 노이즈로 가득하다. 오랜 기간 주워 모은 온갖 잡동사니로 무거워진 주머니는 불편하다. 잰걸음을 느리게 하고, 가끔은 호흡을 가쁘게 하고, 불시에 발에 채이기도 한다. 하지만, 주머니는 견고하고 균질한 물질 사이에 유연하게 몸을 뉠 공간이고, 취하고 싶은 것만을 취하겠다는 작은 욕망의 단위이자 가까이에 숨을 수 있는 은신처다. 전시 《Clumsy Seamless》(2025)는 이런 주머니의 닫힌 입구를 풀어 꺼냈다.

전시 제목인 《Clumsy Seamless》를 둘로 쪼갠다. 먼저, ‘Seamless(이하 심리스)' 는 기술 등을 활용하는 과정이 단순하고 단계의 연결이 부드러울 때, 이를 칭송하는 평가로 쓰인다. 높은 수준의 범용성, 편의성, 고도의 문제 해결 능력과 더불어 (디자인 영역에서 탄생한 만큼) 심미적으로 매끄러운 지점2)을 동반할 때만 비로소 심리스가 작동한다. 그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질주하는 존재들은 뾰족하고 돌올하게 솟아난 정체 모를 돌부리들을 모조리 제거해야만 한다. 돌부리는 누락된 통증, 느슨한 이음새, 지연되거나 비어 있는 시간, 일상을 살아가며 자연스럽게 누적되는 피로감이 켜켜이 쌓여 돋아났을 것이다. 한편, ‘Clumsy(이하 클럼지)'는 어설프거나 서툰 행동과 자세를 묘사하기 위해 쓰인다. 하지만 클럼지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그것은 영혼을 담고 있는 컨테이너(container)로서 신체가 갖는 필연적 한계와 소멸, 신격화되거나 자동화된 이미지에서 떨어져 나온 부스러기와 찌꺼기, 주체와 객체의 결합 과정에서 발생하는 필연적인 덜컹거림, 무구한 실수를 동시에 소급한다. 그 행위는 머뭇거림을 동반함에도 전혀 수동적이지 않다. 클럼지는 능동적으로 효율과 기술이 용해된 이미지를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의심한다. 이런 가벼운 거부는 오로지 제거에 몰두하는 심리스를 새로운 차원으로 불러낸다. 클럼지와 심리스는 서로의 정반대에 서있는 듯하지만, 마치 시작과 끝처럼 쉽게 이별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다시 클럼지와 심리스를 한데 모은다. 《Clumsy Seamless》의 시간은 철저히 현재다. 그 시간이 편집적으로 기워진 과거를 닮았거나 이상하는 미래를 향한 지연된 구간일지라도 지극히 현재에 가깝다. 역사적으로 괄목할 만한 사건이나, 거대한 (포스트가 붙은) 미래 담론은 지금 당장 발생하는 크고 작은 문제들을 초라하게 만들기도 한다. 전시의 작업들은 만료된 과거를 갱신하기 위해 현실을 미루지 않고, 미래를 위해 지금을 숭고하게 재물 삼지도 않는다. 《Clumsy Seamless》는 지극히 지금, 당장 감각하는 차원에서 긍지와 의협심으로 이해 가능한 개별적인 삶(혹은 작품)의 고리를 얼기설기 꿰어내 만들었다.

김도언의 소리는 감각하기 쉽고, 이해하기 힘들다. 일테면, 비정형의 삼각 창틀에 놓인 그의 사운드 설치 작품〈 과속은 금물〉(2025)은 지연되는 시간의 소리를 수집하여 다른 방식으로 출력한다. 비대칭으로 위치한 두 시계에서 소리는 태어난다. 시침과 분침에는 돌이 매달린 채 표면과 상호작용하며 소리와 진동을 발생시킨다. 미세하고 물질적인 사건은 DAW의 Audio-to-MIDI 알고리즘3)을 통해 디지털 신호로 번역된다. 이 기술은 단순하지만 정확한 차이를 만드는데 하나의 시계는 화성적이며 조율된 세계, 또 다른 시계는 바퀴나 지팡이 같이 잡다하게 신체로 이식된 세계의 소리를 호출한다. 김도언은 이 과정을 스티브 라이히(Steve Reich)의 프로세스 음악과 연결하기 시도했다. 라이히는 같은 패턴이 아주 조금씩 어긋나며 새로운 패턴을 만드는 현상을 ‘페이징(phasing)'이라 칭했다. 시계 역시 같은 순간, 동일한 속도로 일정하게 움직이지만 (비)가시적인 요철, 묘하게 다른 무게로 두 시계는 미묘한 낙차를 겪는다. 이러한 간섭과 울림, 지연된 (비)물리적 시차는 마치 디지털-기술 시대의 시간개념과도 닮았다. 디지털 오디오는 완벽히 싱크되어 오차없이 전달된다고 믿지만, 실제 전기 신호는 작은 석영 결정(quartz crystal)의 떨림에 의존한다. 김도언은 시계의 돌을 석영 결정에 은유하며 엉킨 속도의 소리가 공간을 차지하게끔 한다. 역전하고 순환하는 굴레는 격상과 격하를 반복하는 두 시계 사이에 놓인다. 〈과속은 금물〉(2025)은 처음으로 놓인 시계와 두번째로 놓인 시계 사이, 한순간과 다음 순간 사이, 원을 그리며 도는 시계의 분초 표시 사이에 있는 공간처럼 비어 있는 여백4)을 가로지를지 묻는다.

김민희가 만드는 이미지는 보편타당한 아름다움으로 향하지만 도달하지 못한 채 흩어지는 잔상을 한 화면에 꿰어낸다. 그는 좁게는 서울, 넓게는 동아시아에서 탄생해 서구권으로 수출된 (인터넷과 대중매체가 만든) 이상적인 여성의 이미지를 추적해 왔다. 그가 화면으로 옮기는 여성들은 자주적인, 때때로 피동적인 욕망을 통과하며 형태를 잃거나 상흔을 입는다. 〈Skin Landscape〉(2025) 는 흉터와 구멍, 요철과 함몰로 얼룩진 피부를 캔버스로 이식한다. 이를 집도하는 작가는 무결함에 갈증을 느끼는 스스로를 드러내지도, 완벽하게 숨기지도 (않은)못한 채 버벅댄다. 주로 겔(gel)을 덧발라 이미지에 글리치(glitch)를 만들던 지난 작업들과는 달리 미디엄이 만드는 우연을 벗고, 그가 만들어낸 생략, 뭉개짐, 닦아냄을 훼손이나 꾸밈없이 화면으로 떠오르게 한다. 전시에 들어서면 어설픈 마감의 벽화 〈Body Landscape〉(2025)를 마주하게 된다. 〈Skin Landscape〉(2025)가 피부와 얼굴에서 추동된 욕망을 들여다보았다면, 〈Body Landscape〉(2025)는 완벽한 비율의 날렵한 몸에 대한 강박을 내비친다. 김민희는 지난 여름 뉴욕에 위치한 레지던시 Art OMI에서 한 달가량 머물며 스튜디오에서 제공한 벽에 벽화를 그렸다. 벽 위의 그림은 필멸한다. 전시공간의 벽에는 수많은 작품들이 등을 기대었다 가지만, 오직 완성작에게만 허락되곤 했다. 이 사소한 룰은 김민희의 스케치 같은 붓질로 조금씩 무너진다. 그가 습관적으로 끄적대는 천사 같은 아니메 캐릭터는 작가를 닮았다. 자기투영을 통한 자기극복,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견하는 자기모순은 말끝에 흩어지는 ‘구원해달라'는 소원처럼 간절하고 들키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솔직해지고자 하는 김민희의 결심은 단단히 봉해놓은 봉투를 열듯 손가락에 힘이 있고, 벽을 향한 붓질에는 망설임이 없다.

​김은설의 〈불완전한 합성〉(2025)은 자신의 크립 타임(crip time)5)에서 발생하는 오류, 불확실, 산만함과 중첩을 모아 보여준다. 그는 보청기를 통해 소리를 듣거나, 목소리를 받아쓰는 어플리케이션으로 언어를 인식한다. 그와의 대화는 휴대전화 액정에 실시간으로 떠올랐고, 7할은 꽤 정확하게 전달되었지만 3할은 전혀 다른 단어로 곡해하거나 내 목소리와 동시에 들리는 소음을 편입시켜 오역하고는 했다. 이때, 작가와 외부 세계 사이에는 지연과 마찰, 생략과 오류로 인한 피로가 거듭 쌓인다. 〈불완전한 합성〉은 두 채널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의 채널에는 어떠한 시각적인 단서도 없이 소리 해설 자막만이 상황을 설명한다. 자막은 작가의 고유한 언어가 아닌, 시스템으로 필터링된 유효한 언어만을 옮기고 온갖 어지러운 장면을 납작하게 만든다. 동시에 또 다른 채널에서는 작가가 실재로 경험하는 다중 화면이 재생된다. 파편적으로 솟아나 부분적으로 복제된 단서들은 서로 충돌하거나 어긋나며 시각적인 피로와 서사적 혼란함을 부러 유발한다. 두 채널은 하나의 사건으로부터 파생되지만 결코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 완벽히 정제된 언어의 세계과 그 어떤 언어로도 설명될 수 없는 감각의 세계는 작업에서 반복되는 폭포 소리처럼 공중으로 흩어지고, 때로는 몸 안 깊숙이 쏟아진다. 작가는 두 채널이 담당하는 현실과 감각의 틈을 계속해서 메우려 한다. 일테면, 틈은 그가 누군가의 말을 들을(듣고자 할) 때 발생하는 시차나 누락되는 단어와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메우기 위해 문맥, 표정, 상황을 단서 삼아 계속해서 그 사이를 메우려 한다. 불완전한 해설과 이와 간혹 (잘못) 동기화된 포화 상태의 장면들은 김은설이 매일 만나는 현실의 알레고리이자, 그의 몸을 통과해야만 볼 수 있는 만화경의 장면이다.

남화연의 영상 작품 〈당신은 오직 두 번 산다〉(2022)는 어딘가에 정박해 있곤 했다. 《2022부산비엔날레: 물결 위 우리》에서 처음으로 전시된 〈당신은 오직 두 번 산다〉는 선형적으로 흐르는 시간에 구멍을 내고 현재로 건너왔다. 쓸모를 다했지만, 여전히 부산항 북항 제1부두라고 불리는 구역에는 면적 4,785㎡의 거구의 창고6)가 있다. 언제 버려졌는지 모를 선박용 수레, 녹슨 닻, 한때 둥지였을 나뭇가지와 같은 시간의 찌꺼기를 곁에 둔 채 2022년 6월 16일부터 6월 19일까지, 4일간 퍼포먼스 리허설이 진행되었다. 〈당신은 오직 두 번 산다〉 (2022)는 리허설과 그 주변부의 장면을 담는다. 작품의 제목인 ‘당신은 오직 두 번 산다.(You live only twice)'는 어느 인체냉동술연구소 블로그 포스팅 제목에서 왔다. (시베리아의 로티퍼처럼) 삶을 정지하고, 다시 재생하는 인체냉동술은 퍼포먼스라는 결말로 향하기 위해 특정 시점을 거듭 반복하는 리허설의 시간과도 닮았다. 퍼포먼스와 리허설, 생과 멸은 서로를 메아리처럼 모방한다. 퍼포머들은 로댕의 〈지옥의 문〉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도상 중, 세 인물이 아래를 바라보는 〈세 개의 그림자〉 , 뒤엉킨 다종의 몸이 등장하는 〈달아나는 사랑〉등을 모티프로 삼는다. 〈너의 입은 작은 집〉(2022) 은 제1부두 창고를 거처로 삼았던 새들이 물어온 나뭇가지로 엮은 조각7)으로 《Clumsy Seamless》에서 작품은 해체되었다 다시 〈그는 매일 아침 다른 것들이 다른 것들로 태어나는 것을 본다〉8)(2025)로 재생된다. 어설프게 재현된 부두의 전개도가 나뭇가지를 에워싼다. 과거의 시공간에서 발생한 작업을 다른 좌표로 옮기는 일은 정박한 이야기의 닻을 올리고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가게 한다. “다른 것들이 다른 것들로 태어나는 것”을 지켜보는 일은 앎의 범주에서 생경한 것을 보는 것, 타자의 시간에서 내가 만든 장면을 발견하는 것이 아닐까. 결국 우리는 마땅히 설명할 수 없는 형태로 연결되어 있다.

로리 필그림 Rory Pilgrim은 쉐필드(Sheffi eld), 브리스톨(Bristol) 등 여러 도시를 경유하며 시, 테크노, 일렉트로닉, 합창을 결합한 11트랙의 앨범과 뮤직비디오인〈소프트웨어 가든(Software Garden)〉 (2026-2018)을 제작했다. 〈소프트웨어 가든〉은 자동화와 양극화로 전례없는 고립을 맞이한 오늘, “우리는 어떻게 화면 뒤, 화면 너머로 만날 수 있는가?”라고 질문한다. 디지털과 정치 시스템, 로봇과 인류가 케어(care)를 통해 서로에게 접속할 수 있는지를 실험하는 뮤직비디오에는 퀴어, 장애, 노화한 인물과 강하고 젊은 인물이 교차된다. 이는 서로 다른 몸을 가진 인류 사이의 연결가능성에 대해서도 묻는다. 로리 필그림은 한 인터뷰에서 그가 작업을 구현해내는 방식은 ‘믿음(Trust)'이라고 전했다. 필그림은 〈소프트웨어 가든〉 전반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 라인댄서들을 예시로 들었다. 여러 라인댄스 그룹에 연락을 취했으나 호응을 얻지 못했고, 그중 한 그룹에게 영상 출연 제안을 하기 위해 약 1년간 그들의 레슨에 참여하며 춤을 배운 일화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의 작업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일은 관계를 만드는 것이며, 관계란 무릇 개인이 만드는 것에 한계가 있기에 존경과 배움의 자세로 타인의 숙련됨을 믿는 자세에서 만들어진다고 전했다. 작품 전반에는 쉐필드 출신의 시인이자 장애 인권운동가인 캐롤 알 캘런드(Carol R. Kallend)가 등장한다. 캐롤은 영국 정부가 장애인 돌봄 지원을 삭감하며 자연스레 감소한 돌봄 서비스를 로봇으로 대체해 달라는 목소리를 내왔다. 11트랙 중 ‘다문화주의자의 파이 차트'에서 인공지능을 가진 로봇과 교감하는 캐롤의 모습은 단순한 기능이나 효율을 넘어, 교감과 친절을 베푸는 로봇 동반자와의 삶을 능동적으로 긍정한다. 〈소프트웨어 가든〉은 안무가 캐시-오거스타 예르겐센(Cassie-Augusta Jørgensen)의 움직임으로 고양된다. 그는 몸이 지닌 정치적, 촉각적인 메세지를 전달하며 ‘소프트웨어'를 안무로 번역한다. 작품 배경은 익명의 무대부터 미군이 여전히 주둔하는 오키나와의 해안, 쉐필드의 한 비종파의 예배당에서 포틀랜드 섬으로 이동하며 권력과 무기력, 효율과 여유, 영성과 세속처럼 언뜻 닿을 수 없는 두 지점의 화해를 도모한다. 로리 필그림에게 미술은 타자를 깊이 공감하는 순간과 입을 모아 목소리를 내는 행동에서 움트고, 여럿이 모인 하나의 공동체는 그가 가장 솔직하고 자유롭게 미술을 다루는 마법의 무대가 된다.

송민정은 언어화할 수 없는 장면들을 만든다. 〈라벤더〉(2025)는 떠오르는 상을 따라가 만난 이미지를 작고 가볍게 만들어 전시에 놓은 장면이다. 작가가 만드는 장면은 이미지와 마찬가지로 이렇다 할 방법이나 담론으로 설명할 수 없기에 그가 타고난 이야기꾼이라고 느낀다. 송민정의 이야기는 매끈한 서사라기보다는 분절된​ 단어들과 편린으로 이루어져 있어 그들이 만들어내는 분위기로 전체를 추측하게 만든다. 〈라벤더〉는 크게 두 가지 장면을 보여준다. 밝은 전시실에는 비누로 조각된 청소 노동자가 음악을 들으며 쉬고 있다. 성별과 나이가 모호한 표정 없는 인물은 일과 휴식의 틈에서 이어질 노동을 유예한 채, 잠시나마 다른 차원으로 이동한다. 어두운 전시실에는 일을 마치고 돌아와 녹초가 된 몸을 이끌어 겨우 식탁에 기댄 채 고꾸라진 꽃 사람이 등장한다. 그 무엇도 매끄럽게 흘러가지 않는 매일의 스트레스, 지루함과 권태로 지친 인물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내일로, 혹은 잘 모르는 어떤 시점으로 건너가려 한다. ‘라벤더'는 상대적으로 굵고 기다란 꽃대 위에 토끼 귀 모양의 자잘한 꽃이 나고, 허브향과 꽃향기가 적절하게 섞여있다. 완전한 꽃도, 완전한 풀도 아니다. 흔히 알려진 라벤더의 꽃말은 침묵이다. 그렇기에 라벤더의 시간은 적요하다. 공중과 바닥에 흩어진 조용하게 나부끼는 커튼, 빈 일회용 컵, 말라버린 이파리처럼 〈라벤더〉의 흔적들은 익명적이지만 뒤로 숨어있진 않는다. 작가의 말을 빌려 〈라벤더〉를 명료히 하자면, 절망, 과로, 좌절, 슬픔, 한숨, 지루함, 답답함을 해소하기 위한 휴게의 시간. 박제된 시간이 아닌 삶을 연속시키는 접착제 같은 시간이다. 이 시간에는 진동과 고요와 냄새가 서로 알맞게 지쳐있다.9)

엘리노 하이네스 Elinor Haynes의 조각은 축축하고 미끌거린다. 그의 조각은 생동하기에 징그럽고, 차마 희석할 수 없는 핏기가 돈다. 그의 조각을 살펴보면 불쾌감을 비껴갈 수 없다. 《Clumsy Seamless》에서는 《꿀꺽》(두산갤러리, 2024)에서 전시되었던 〈Dry spell〉을 해부한다. 고깃덩어리와 인공물이 결합한 것처럼 보이는 형태와 색을 한, 간신히 생을 연명하는 종을 알 수 없는 조각이 바닥을 기어가고 있다. 육중하고 오래된 유럽식 음수대에 고인 물을 삼키기 위해 다가서는 비인간 형상의 작은 조각들을 개별적으로 보여
준다. 목마름, 나와 다른 무언가를 삼키고자 하는 욕망을 좇던 작은 조각들은 〈잠이나 자면 까먹을거야〉, 〈 마구 때리기〉라는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된다. 딱딱하고 육중하고 대칭적인 조각이 아닌, 모유, 구멍 난 뼈, 침이나 땀 같은 것들이 뒤엉켜 발생한 조각은 액체적이고 내재적이다. 하이네스의 작업은 주로 불어서 만드는 유리(blown glass)같이 무형을 감 싸는 덩어리에서부터 시작해서, 소리, 단순하게 움직이는 애니메이션, 냄새와 같은 완전한 무형으로 번진다. 짧은 영상 〈널 용서하면 난 해방이야〉(2025)을 포함한 그의 작업은 대체로 여성적 언어에서 나온다. 작가는 “자신의 몸은 밀폐된 용기가 아니라, 스며들고 새어 나오는 존재”10)라고 말하며, 타자와 어떻게 감염되고 감염시킬 것인지 고민한다.

《Clumsy Seamless》는 이곳에 잠깐 머물렀으므로 존재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11) 늘 무언가를 의심하거나 어렴풋한 기억을 믿지 못하는 모두를 위한 작은 확언이다. 이곳에서 이것이 일어나(났)고, 이것은 진실이고 이어지는 것은 진심이다. 처음으로 돌아가, ( )는 여전히 어설플 것이다. 그래도 이곳에서 솔직하고 용기 있게 해내고 싶다. 재촉하지 않고 주머니 밖으로 천천히 꺼내두고 싶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 대니 샤피로, 『계속 쓰기: 나의 단어로』 (2022), 마티, 21쪽
2) 김원영, 김초엽, 『사이보그가 되다』 (2021), 사계절, 237-238쪽에서 매끄러움과 심리스에 대한 설명을 재구성했다.
3) DAW(Digital Audio Workstation)의 Audio-to-MIDI 알고리즘 : 오디오 신호를 트리거로 하나의 미디 신호가 발생한다. 이후에 하나의 미디 신호가 미리 프로그래밍 된 미디 체인을 통해 또 다른 연쇄 적인 미디 신호를 발생시킨다.​
4)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야생의 심장 가까이』(2022), 암실문고, 250쪽.​
5) 크립타임은 ‘시간적 규범성'을 전복시키는 개념으로, 개인마다 다른 삶의 속도를 균질화하는 선형적 시간성을 비판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한창희, 「 랑시에르의 미학과 크립 타임(Crip Time) : 감성의 분할과 주체-되기의 정치성」 (2023), 문화예술융합연구, 4(3), 105–116쪽을 참고하라.​
​6) 1911년경 시설을 갖춘 부두에 1977년 들어선 철골 테라스 구조의 창고는 2008년부터 추진되고 있는 북항재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사용되었다. 김기수, 남윤순, 「부산항 제1부두의 건립과 변화과정에 관한 건축적 고찰」 (2019), 석당논총, 73, 399-432쪽을 참고하라.
​7) 김해주 외 9인, 『 2022부산비엔날레: 물결 위 우리』 도록 중 남화연 작가 및 작품 설명 (2022), 사단법인 부산비엔날레조직위원회, 168쪽.​
8) 남화연의 작품 〈당신은 오직 두 번 산다〉(2022)에 나레이션으로 등장하는 문장이다.
9) 송민정의 작가노트에서 발췌했다.
10) 엘리노 하이네스의 작가노트에서 발췌했다.
11) 리디아 데이비스, 『못해, 그리고 안할거야』 (2024), 에트르, 21쪽의 ‘여기 아주 잠깐 머물렀으므로 이곳에 와본 적이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를 변형해서 썼다.​



​작가 및 기획자 소개

김도언(b. 1998)은 전자음악가로 음악, 소리, 때때로 시각예술작업을 다룬다. 대안적인 팝과 초기 전자 음악의 향수를 담은 정규 앨범 『Damage』(2022)을 발표했다. 음악과 설치 작업으로 《전율(電律)》(KT&G 상상마당 춘천, 2025), 《나는 내가 선택한 곳으로 가는 것을 좋아합니다.》 (LDK, 2024), 《마음 속》 (봄바니에 뉴욕, 2023)등 전시에 참여한 바 있으며, 신도시, Channel 1969 , DMZ 피스 트레인 뮤직 페스티벌 등 크고 작은 베뉴에서 음악을 선보였다.

김민희(b. 1991)는 K-pop, 애니메이션, 인터넷 문화가 형성한 이상화된 여성 이미지를 탐구한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 변형된 아름다움을 추적해 신체를 재현하는 과정에서 만난 욕망, 갈등, 불안을 유화와 아크릴로 그린다. 개인전 《버서커》(뮤지엄헤드, 2024), 《Image Album》(실린더, 2023), 《고스트비키니》(아웃사이트, 2020),《오키나와 판타지》(합정지구, 2018)를 열었고,《히스테리아》(일민미술관, 2023), 《Natural Born Odd》(살리하라 아트센터, 자카르타, 2023), 《FUNKY-FUNCTION》(대구미술관, 2022), 《물속의 겨울잠Underwater Hybernation》(PlaceMak3, 2021)등 다수의 기획전에 참여했다.

김은설(b. 1988)은 보청기를 사용하고 있지만, 청각을 벗어나 다른 감각으로 소통한다. 듣는다는 게 무엇인지, 듣는 것이 존재의 의미와 본질이 어떻게 이어지는지에 응답하기를 시도하고 있다. 개인전 《중간언어》(탈영역우정국, 2023), 《덤불숲》(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2020), 《풀실놀이》(룬트갤러리, 2018)를 열었고, 《기울인 몸들: 서로의 취약함이 만날 때》(국립현대미술관, 2025),《열 개의 눈》(부산현대미술관, 2025),《말하는 머리들》 (서울시립미술관, 2025),《여기 닿은 노래》(아르코미술관, 2024)등 다수의 기획전에 참여했다.

남화연(b. 1979)은 존재의 유한함과 시간의 신비에 줄곧 사로잡힌다. 개인전《가브리엘》 (아뜰리에 에르메스, 2023), 《마음의 흐름》(아트선재센터, 2020),《시간의 기술》(아르코미술관, 2015)등의 개인전과 제56회 베니스비엔날레 본전시(2015) 등에서는 인간과 자연, 역사 등 서로 다른 리듬과 주기를 경유하며, 기록된 시간이 현재에 새롭게 도래하는 사건으로 이행하는 현상에 대한 탐구를 보여 주었다. 2012년 이래 근대 무용가 최승희(1911-1969)가 남긴 작품 자료와 행적을 잇는 다년간의 리서치를 진행했으며, 이는 퍼포먼스와 퍼포먼스 아카이브의 모순적 관계성 및 다성적 역사 쓰기로 확장되었다. 관련 작업은 《Performance/Documentation/Presentation》(룬드 미술관, 룬드, 2020), 제58회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2019), 페스티벌 봄(2012),등에서 전시 및 공연되었다.

​로리 필그림 Rory Pilgrim(b. 1988, 영국)은 ‘해방적 문제해결'을 중심에 두고, 개인의 경험과 발화로 우리가 어떻게 모이고, 말하고, 들으며 사회를 변화시키는지 탐구한다. 개인전 《Rory Pilgrim: Solo》(란트하위스 우트-아멜리스베르트오 중앙박물관, 위트레흐트, 2024), 《Gardens and Tides》(드 스쿨, 암스테르담, 2021),《The Resounding Bell》(사우스 런던 갤러리, 런던, 2018),《Software Garden》(로잉 갤러리, 런던, 2017)등을 열었고, 기획전 《Interdependencies》(미그로스 미술관, 취리히, 2023),《Radio Ballads》(서펜타인 갤러리, 런던, 2022), 《Prix de Rome 2019》 (스테델릭 미술관, 암스테르담, 2019)등에 참여했다. 그의 작품은 리움미술관(2023), 화이트채플 갤러리(2023), 뉴욕현대미술관(2022) 등에서 상영되었고, 2023년 영국 터너상 최종 후보로 이름을 올렸다.

​송민정(b. 1985)은 삶을 지탱하는 불균형하고 미시적인 힘의 형태들을 탐구한다. 개인전《분위기》(합정동 359-11, 2023)와 《COLD MOOD(1000% soft point)》(취미가, 2018) 등을 열었고, 기획전
《2022 부산비엔날레: 물결 위 우리》(부산현대미술관, 초량, 제1부두, 2022), 《2020 부산비엔날레: 열 장의 이야기와 다섯 편의 시》(부산현대미술관, 2020), 《밤이 낮으로 변할 때》 (아트선재센터, 2019), 《젊은 모색》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2019) 외 다수의 그룹전에 참여했다.

엘리노 하이네스 Elinor Haynes(b. 1995, 프랑스 & 호주)는 생동하는 물질로서의 신체 탐구에 주목한다 . 조각, 드로잉, 영상 매체를 넘나들며 작업한다. 《베니스디자인비엔날레2025-Extinction / Salvation》(SPARC, 베니스, 2025), 《Future relics》(유니온 퍼시픽, 런던, 2025), 《꿀꺽》(두산갤러리, 2024), 《Faux》(더 스플릿 갤러리, 런던, 2023), 《Annual Sadness》(디 오간 팩토리, 런던, 2023)등의 전시에 참여했으며, 2023년 케네스 알미티지 젊은 조각가상과 2024년 영국 왕립 조각가 협회 길버트 베이즈 상을 수상한 바 있다.

이지언(b. 1994)은 마산에서 태어나 서울 안과 밖에서 글을 쓰고 전시를 만든다. Sci-fi 에 등장하는 이미지와 미래의 몸에 관심이 있다. 《시대복장 Iconclash: Contemporary Outfi ts》(일민미술관, 2025), 《Tasty Shield》(Industra Gallery, 브르노, 2025), maltabiennale.art 2024 주제관 《Hybrid Lanscape is Isolated》(국립고고학박물관, 발레타, 2024), 《느리고 빠른 이식(A Deliberate and Rapid Transplant)》(문래예술공장, 2023), 《물속의 겨울잠(Underwater Hibernation)》 (PlaceMak3, 2021)등 다수의 전시를 기획했고, 《Brief Encounter》(WWNN, 2025), 《꿀꺽》(두산갤러리, 2024)등을 공동기획했다.


​전시 크레딧
Clumsy Seamless

기획: 이지언
참여작가: 김민희, 김은설, 남화연, 로리 필그림, 송민정, 엘리노 하이네스
사운드: 김도언
디자인: 이건정
사진: 진현
영상설치: 명성미디어
대관 협력: 금호미술관
감사한 분들: 김정원, 김재현, 유지오, 이계성, 함성주

2025년 서울문화재단 예술창작지원사업 선정 프로젝트
주최·주관: 이지언
후원: 서울시, 서울문화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