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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호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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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적 시선 - 송수련

관조의 본질

- 송수련의 근작에 대해-


 

송수련의 작업은 그린다기보다 지운다는 역설적 방법에 지지된다.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지워진 흔적으로서의 자리만이 떠오른다. 화면엔 무언가 구체적인 대상이 잡히지 않는다. 구체적인 존재가 지나간 흔적만이 가까스로 남아있다. 빈자리는 애초에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있다가 지워진 것이다. 존재에 대한 지워짐의 알리바이라 할까. 그러기에 그의 화면은 자각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종이와 종이위에 시술되는 안료의 물성이 어우러져 표현이란 자각적 진술로 현현되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를 두고<마지막 본질> 만을 남기려는 일이라고 술회한다. 단순히 없는 것이 아니라 지우고 가린 이후 마지막으로 남아난 엣센스로서 말이다. 그러고 보면, 그가 30년에 가까운 작업시간을 통해 일관되게 견지해오고 있는 <관조>가 사물의 유한한 세계를 넘어 추상적 본질에 닿으려는 소망임을 확인하게 된다. 그러기에 물리적 시선으로서의 세계와의 관계가 아니라 내안의 내면적 시선으로서의 세계와의 관계가 추구된다. 작가는 빈번히 자연에 대해 언급한다. 자신의 예술적 뿌리가 자연으로부터 온 것이란 사실을 천명한다. 그러나 자연은 단순한 물리적 대상으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일종의 시공간을 연결하는 우주적 관념으로서의 자연이다.

화면의 시원으로서의 공간감이 강하게 표상되는 것도 필경 여기에 근거함일 것이다. 화면은 일종의 전면성으로 구현된다. 바탕인 종이는 선염의 진행으로서 전면성으로 이어진다. 거기 긁힌 자국, 얼룩, 그리고 일정하게 반복되는 점, 점, 때로는 식물의 줄기 같은 가녀린 흔적들이 지나가는가 하면 봄날 매화가지에 움터는 꽃망울 같은, 또는 밤하늘에 흩날리는 유성과 같은 작은 점들이 수없이 화면을 누비고 지나간다. 어쩌면 그것들은 작가가 언급한 <봄의 푸릇한 기운과 여름의 무서운 분출과 성숙을 경험한 자연, 그리고 이제는 그것을 툭툭 떨어버리고 마지막 본질만 남긴 자연> 인지 모른다. <명상과 삶의 흔적을 포함하는 보다 보편적인 존재의 기억>등인지도 모른다.


 

장르상으로 본다면, 그의 작업의 방법은 한국화란 유형속에 포함된다. 무엇보다도 지지체로서의 한지와 수성이란 질료로 인한 표현은 어떤 매체와도 비교될 수 없는 푸근하면서도 담백한 여운을 준다. 사실상, 한국화가 이 같은 질료적, 매체적 속성을 벗어난다면 굳이 한국화일 수 있겠는가. 오늘날 적지 않은 작가들이 한국화가 지닌 속성을 벗어나는 것을 대담한 실험이나 개혁으로 스스로 미화하고 있는 터이다. 굳이 한국화라 칭할 필요가 있는가 자문하기도 한다. 이런 풍토 속에서 한국화의 정체성에 대한 확고한 자의식을 지닌 작가들을 만나는 것은 더없이 소중하고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지지체(한지)에 대한 극명한 인식과 그로 통해 구현되는 투명한 깊이의 표현은 한국화만이 지니는 미의식이다. 또한 그의 화면은 한국화라는 특정한 유형으로만 묶을수 없는 보편적인 현대적 의식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도 돋보인다. 반복의 구조를 통한 전면화의 방법은 한 시대의 유형으로서 미니멀리즘과도 일정한 견인관계를 유지해주고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일종의 시대적 미의식에의 공감이라고나 할까.

자칫 미니멀리즘 또는 개념예술이 지닌 차거운 논리성이 한국화 특유의 질료의 방법을 통해 극복해주고 있다는 점도 지적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을 최소화하는 극단적 환원의 방법은 어쩌면 또 다른 역설로 인해 새로운 차원을 만들어내지 않을까 생각되기도 한다. 최광진이 언급한 <그의 최근 작품에 어김없이 나오고 있는 점들은 자연을 최소로 환원시킨 단위이지만 역설적으로 곧이어 도래할 자연의 화려한 자태를 예고하는 것>으로서 말이다.

이 예감에 찬 역설을 기대해본다.


 

오광수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