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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호미술관

전시안내

Symphathize with My Heart - 장진

장진의 감각(感覺)을 의심하는 창조적 감각,

또는  ‘계속적으로 새로워지는 즉시성(卽時性)'

 


 장진의 이미지는 감각적이다. 세련된 절제미, 담백한 먹의 실현, 자연의 사색, 먹과 주사먹의 강렬한 대립, 특히 주사먹의 농담이 만들었던 불타는 듯 노을의 이미지… 그 저변에는 먹에 대한 얄팍하지 않은 이해가 있다. 이는 작가의 오랜 치열한 실험과 모색, 시행착오와 반성의 대가로 주어진 것이다. 그 결과, 장진의 먹색은 스스로를 평정을 위태롭게 하고, 안정을 뒤흔드는 실험들 속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는다.

장진의 회화는 더 깊고 심오하며, 본질에 다가서는 지각을 추구해 왔다. 그가 무수하게 갯벌을 그리고 갈대를 스케치할 때도, 그는 그 단순한 외관을 재현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묘사와 서술은 그가 걸어왔던 여정이 아니다. 장진의 것은 오히려 세계와의 접촉지점을 줄여나가는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다. 예컨대, 감각의 자극하고 흥분시키는 요인들을 배재하는 것, 화려한 문제나 공허한 위트, 수려한 기술적 조치, 변화무쌍한 기예의 절제, 완화, 소거. 장진이 마주하기를 고대하는 본질은 과학적인 그것이 아니다. 일테면 인간이 염분과 당, 철과 수분으로 이루어졌다는 식의 담론과는 하등 무관하다. 사회적인 것도, 초월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소음, 동요, 혼돈의 요인들로부터 벗어나 세계 그 자체 앞에 서고자 하는 지향성 같은 것이다.

장진의 회화는 자연으로부터 출발하지만, 자연의 외적인 재현을 넘어 나간다. 외모는 때로 너무 번접스럽다. 그것은 관조된, 또는 관상(contemplation)된 자연이다. 그것에 의해 자연의 본성은 가장 잘 스스로를 드러낸다. 그것은 ‘작가와 풍경이 하나로 삼투되는' 풍경이다.(고충환) 임의적인 해석의 칼날을 들이대는, 즉 사물을 주체성으로 강간하는 것과 거리가 먼, 작가 자신의 표현을 빌자면 ‘시적 공간'을 허용하는 방식이다. ‘시적(poetic)'의 의미에는 현실과의 긴장관계가 암시되어 있다. 현실과 무관하지 않지만, 현실에 예속되거나 귀속되지 않는 질서의 의미인 것이다.

시적 토양은 장진의 미학적 노선을 대변하는 개념이다. 이번에 그는 자신의 토양을 더 깊이 경험하고 경작하는 쪽으로 나아온다. 시어(詩語)의 내밀한 차원으로의 더 깊은 침잠을 허용하는 방향! 해서 그의 근작들은 사물의 세계와 기억으로부터 더 멀어진다. 선(線)은 사물의 재현에 더 이상 연연해하지 않는다. 붓은 화폭 위에서 더욱 온전한 자유를 추구한다. 오로지 자유로이 자신의 단속과 연속, 강약과 장단에 집중한다. 규범, 세련미, 관습이 지정하는 조화, 타성에 젖은 균제미 등은 더 이상 의미있는 기준이 아니다.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지만, 풍경은 조용히 자취를 감춘다. ‘서술(narrative)'이라는 유형의 질서도 차지할 자리가 없기는 매한가지다. 빈자리는 ‘시'라는 이름의 의심, 질문, 저항, 실험과 같은 자유의 담화들의 몫이다. 여기서 예술은 ‘거울'이 아니라, ‘베일'에 가깝다.

그렇더라도, 이 시적 저항과 자유를 세계와의 결별이나 단절로 독해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다만 세계의 지각된, 낯익은 인상이 아닐 뿐이다. 하지만, 세계가 위태로운 불명료함 속에서 더욱 선명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경향이 있음을 생각할 때, 그 불편한 개방성이 오히려 더 궁극적으로 세계를 포착하는 방식일 수 있다. 우리의 지각체계에 즉각 부합하지 않는 이 모호함의 이미지는 뭔가 새로운 세계로 이어질 여지를 머금고 있는 잠시의 중단, 새로운 사고와 행동으로 이어지기 직전의 창조적 정지의 순간이기도 하다. 세계와 사물이 더 투명하게 드러나기 직전의 에너지로 가득한 불안정한 어두움, 창조적인 부재 …, 퀘이커 교도인 토마스 켈리(Tomas Kelly)의 표현이 여기에 적절하다. ‘계속적으로 새로워지는 즉시성'! 긴장을 머금은 한 순간의 존엄성, 그것은 종료가 아니라 과정이며, 사건 이후가 아니라 그 한 가운데다. 이는 장진이 자신의 회화를 결론을 향해 치닫는 괴물이 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인 결과일 것이다. 이야말로 결론을 생각할 즈음, 다시 개방으로 나아가는 그의 태도의 산물인 것이다.  

장진의 세계는 폭 보다는 깊이를, 도시적 세련미보다는 진지함을 추구하는 쪽으로 나아간다. 어떤 면에서 그의 먹의 실현은 이전보다 덜 자극적이고 더 실험적이다. 그 색은 더 이상 기름진 세련미를 표방하지 않는다. 기예와 기술은 억제되어 있다. 서술의 욕구를 더욱 줄인 결과, 세계로부터 조금 더 초연해지고, 멀어졌다. 장진은 자신의 회화가 여전히 실험과 연관된 것이기를 바란다. 그것이 몸에 밴 감각과 사고활동의 안주를 다시 역동시키는 데 유효하기 때문이다. 장진에게 그것은 매너리즘, 곧 의식과 그 실현 전체가 자동항해를 하는 비극적인 결과에 도달하지 않기 위한 기제다.

장진은 감각이 없는 작가가 아니다. 하지만, 감각은 남용되어선 안 될 도구라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다. 그것은 정신의 긴장감을 흩트리고, 피상에 머물게 하며 어떤 ‘본질적인 불확실함'을 지각하지 못하도록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감각은 ‘보다 순수한 감각'으로 나아가기 위해 요구되는 필연적인 집중과 성찰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장진의 회화는 성능이 좋은 감각의 결과라기보다는 그것과의 싸움의 결과에 더 가깝다. 여기에서는 감각과 그것을 진정한 의미로 상승시키는 감각에 대한 의구심이, 재능과 그것을 통제하는 의식적 실험이 동시에 목격된다. 장진이 창작자로서 좋은 자질을 겸비하고 있다는 반증이 아닐 수 없다. 

  

 

                                                                                      심상용(미술사학 박사, 동덕여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