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금호미술관

전시안내

2009 KUMHO YOUNG ARTIST

JUNG Yoon Suk - 88

 

 

그래도 우리는 희망을 믿는다. 그래서 어른들도 믿어라 88

 

                                                                                                                                                          이 슬 비

                                              

  이 글은 미술 평론이 아니다. 정윤석의 작업을 통해 반추해본 나의 이야기이며, 우리 세대는 물론이고 앞으로 이 세상을 함께 살아가야 할 모든 이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사실 평소 뉴스나 신문도 안보고 시사적인 문제에 대해 별 관심도 없는 내가 2년 넘게 뉴스를 기록하고 정리하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린 한 작가의 작업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무척 부담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갑자기 큰 사건이 터지기라도 하면 하루 종일 불안하다는 그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별 표정없이 “아, 그래요?” 라고 반응했지만 마음 속으로 ‘오타쿠, 오타쿠, 오타쿠'를 외쳤다.

하지만 갑자기 궁금해졌다. 나와 같은 세대이기도 한 이 젊은 작가는 왜 매일 뉴스를 기록하며, 2년 넘게 지켜본 한국의 현실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전 기본적으로 사회적 ‘풍경'에 관해 관심이 많고, 그것을 묘사하는 작업들을 진행해왔어요.”

  정윤석의 이번 전시는 뉴 아티스트가 보여주는 첫 번째 개인전으로는 특이하게도 지난 2년여간 지속적으로 관찰해온 한국 사회의 한 풍경을 정리해서 보여주는 주제전이다. 그는 자신의 지난 작업을 통해 작가로서의 스스로를 드러내기 보다는 소위 ‘88만원 세대'로 불리는 자신이 속한 세대의 기억을 펼쳐 보이는 방식으로 전시를 기획했다. 그리하여 ‘해가 뜨기도 전에 지는 이런 상황'을 경험하며 불안하기만 한 88만원 세대가 함께 기억하는 시작점은 88 서울올림픽 개막식 장면이다. 그리고 우리가 공유하는 가장 최근의 기억은 바로 ‘용산참사 사건'이다. 사실 이 전시는 그의 말처럼 현실의 어떤 부분을 그대로 전시장에 옮겨 온 것과 같다. 과거의 미술이 바깥의 풍경을 담는 거울이었다면 그의 작업은 그 자체가 풍경이 되었다.

  <불타는 신기루>는 지난 1년간 뉴스를 가장 뜨겁게 달구었던 초현실적 현실, 촛불집회를 그려낸 한편의 뮤직 비디오이자 64분의 거대한 음악다큐이다. 하지만 이 작업을 보고 가장 먼저든 생각은 우리는 왜 이 시점에서, 이 전시장이라는 공간에서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UCC와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이는 이 영상을 보아야 할까라는 의문이었다. 게다가 정윤석의 과거 작업을 비추어 보았을 때 <불타는 신기루>는 시의성은 분명하게 확보했지만 그것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거리는 충분히 확보하지 못하고 일반화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촛불집회에 대한 성찰은 아직 진행 중이며, 다분히 대중의 자발성을 찬양하고 촛불이 승리했다는 식의 논리에서 더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대중의 삶을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촛불집회는 타자화된 대중들의 형상인 동시에 구체화된 소수자들의 형상을 담아내지 못했다. 쇠고기 재협상 요구로 촛불시위는 전국적인 힘을 발휘했지만 비정규직 문제, 교육 자율화, 민영화 반대와 같은 또 다른 사안들은 광우병 반대라는 대의 속에 함몰되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실 실질적으로 자신의 삶과 맞닿아 있지 않으면 대중은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그것은 바로 ‘용산참사 사건' 이후에도 드러나는 사실이다. 그들의 죽음은 사회적 죽음을 체험하는 형식이기도 하다. 대중은 장차 십년 후에나 발생할 질병에 대해서는 분노하지만 현재 타인의 죽음 앞에서 촛불은 지난 여름의 기억처럼 쉬이 타오르지 않았다. 그것이 바로 타인에 무관심한 우리의 모습이며, 타자의 고통이 곧 우리의 고통과 뗄 수 없음을 인식하지 못하는 우리의 풍경이다. 우리는 이 같은 현실에서 탈주해야 할 것이며, 우리 세대의 고민은 바로 모순적인 현실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하는 것은 아닐까?


 

“지난 여름 우리 세대가 과연 뒷짐을 지고 있었나? 전 아니라고 보고 있고, 저 스스로 이 작업을 통해 증명하려 했다고 생각해요. 결국 촛불집회는 우리 세대도 동참했고, 그와 같은 폭력에 대해 목격자가 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제가 이 전시에서 ‘우리 세대가 어떠한 시대적 기억을 공유하며 공동체를 향한 열망을 지켜갈 수 있을까'라고 질문했던 것은 생각보다 무척이나 간단한 것일 수도 있다는 겁니다.”

  사실 내가 정윤석의 작업을 보면서 잃어버린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었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내가 그의 작업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놓쳤다기 보다는 이미 내 삶 속에서 놓친 것이라고 보는 편이 좀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첫 번째는 내가 촛불집회가 일어날 수 밖에 없었던 경악 그 자체에 대해 망각했다는 사실이다. 나 스스로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누군가 나의 생명을 좌지우지된다는 타자라는 사실을 깨달은 그 순간을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하나의 사실은 내가 촛불집회라는 그 사건에 ‘참여'했으며, 그 현장에 ‘함께 있었다'는 것이다. 사실 나는 실제 경험보다도 그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관찰자의 입장을 고수하기를 바랬다. 일정한 거리를 둠으로써 나를 발견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론이 실천이 되어야 한다.' ‘미술사도 사람의 일이다.' 늘 속으로 중얼중얼거렸지만 앎을 통해 삶을 구하겠다는 구체적인 의지가 없었다는 사실을 부끄럽지만 나는 고백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이 작업을 내용과 달리 다른 외부의 기준을 빗대어 해석하는 것 아니냐”는 정윤석의 날카로운 지적도 겸허히 받아들이겠다.


 

“제가 생각하는 촛불시위의 정의는 '축제' 그 자체였거든요. 많은 사람들이 즐겁지 않았으면 그 100일 동안 거리로 나오지 못했을 것 같아요.”

  특히 물대포와 같이 즉각적인 폭력 앞에서의 두려움을 불꽃놀이와 같은 유희로 승화시키는 장면에서 정윤석은 큰 울림을 느꼈고 희망을 보았다. <불타는 신기루>에서 시민들은 폭발적인 음악과 함께 나오는 거침없이 뻗어나는 물대포에 맞서서 진압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쏟아지는 물대포에 넘어지고, 형광색소와 최루탄의 뒤범벅에 눈과 목이 따가워도 그것이 그들의 굴복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집회가 축제 형태로 ‘변질'되었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집회에서 축제로의 ‘변신'은 아주 자연스럽고 모두가 동의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즐기러 나왔다고 해서 무슨 문제 때문에 거리에 나왔다는 사실마저 잊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축제와 놀이는 고병권이 지적하듯이 2000년대 이후 한국사회의 운동이 발명해 낸 ‘새로운 형식'이었다. 문제는 ‘축제 형태의 시위'가 점차 ‘시위 형태의 축제'가 되는 것에 있다.

  암튼 마지막까지 축배를 높이 올리듯 촛불을 든 시민들은 지난한 싸움에서 담담하게 스스로의 자존감을 지켰다. 희망은 절망을 직시할 때 보여진다. 인간이 ‘살아남기' 위해 온몸으로 저항할 때 그 내부에는 돌과 같은 희망이 생긴다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한 것이다. 


 

“제가 항상 생각하는 것은 사람들은 잘 잊고 쉽게 용서한다는 거에요.”

“지금 현실에서 등 돌리지 말자는 것이지요. 우리도 언젠가는 어른이 될테니까요.” 

  한국 사회는 참으로 사회적 약자에게 잔인한 사회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은 충격적인 현실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방어기제로서 현실의 익숙해짐을 선택한다. 그러나 이같은 익숙해짐은 현실의 경계 속에 피폐해진 나 자신을 그리고 타인을 나몰라라 하는 ‘싸구려 용서'일 뿐이다. 제니스 A.스프링은 ‘순수한 용서'는 가해자에게 보상을 요구하여, 가해자가 기꺼이 지불해야 하는 대가와 함께 얻을 수 있다고 했다. 우리는 참혹한 현실을 용서하기에 앞서 정확한 미움의 감정을 깨닫고 더욱 옹골찬 몸짓으로 철저히 따지고 규명해야 한다고 한다. 스스로 피해자임을 부정함으로써 피해자가 배제된 용서는 자신의 삶을 포기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리고 이것은 타인에 대한 무관심, 즉 공동체 의식의 부재를 반증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분명한 것은 서로 함께 살아야 한다는 사실 그 자체이다.

  88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순간 무수한 환영들에 놀라 장롱에서 울음을 터뜨렸던 한 꼬마가 이제 20대를 거쳐 어른이 되기를 준비하고 있다. 그는 그때의 울음을 곱씹으면서 더 이상 어른이 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는 한 사회를 이끌고, 한 가정을 이끌어야한다는 책임감의 무게 때문만은 아니다. 이는 작은 용기와 작은 실천을 통해 암울한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 희망을 보았던 그의 진심어림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정윤석, 그는 ‘계몽적인, 너무나도 계몽적인' 작가이며 한 인간이라고. 하지만 그가 의도적으로 우리를 계몽하기 위해 작업을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은 아니다. 예술은 교화사업도 자선사업도 아니다. 지금 남들은 가뜩이나 스펙 쌓기도 바쁜데 그는 참으로 한가하여 우리를 계몽하는데 괜한 시간을 소비하고 있기 때문도 아니다. 이같은 생각은 ‘모르는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는 그의 원칙에서 출발했다.

  정윤석의 작업은 <박수>처럼 자기반성에서 시작하지만 결코 내적 성찰에 머무르지 않고 적극적인 행보를 보인다. 자신에 대한 성찰은 곧 타인에 대한 성찰로 이어지며, 타인의 고통을 함께 짊어지고 가야한다는 사회적 책임으로 귀결된다. 그리고 이는 곧 그의 작업을 마주하는 나의 성찰로도 연결된다. 그의 말처럼 진정한 계몽이란 거대한 무엇이 아니라 작은 실천에서 시작한다. 그의 작업이 세상을 바꿀 수 있기 때문에 계몽적인 것이 아니다. 그가 가진 희망이 작품에 반영되고, 그것을 본 사람들이 같은 희망을 꿈꿀 수 있기 때문에 계몽적이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풍경은 단순히 풍경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 풍경 속에는 그도 있고 우리도 있고 모든 세대가 함께 있다. 88올림픽에서 촛불집회까지 이르는 기억은 우리 세대의 기억이기도 하지만 윗세대들과 함께 공유하는 기억이기도 하며 아랫세대에게 물려줄 기억이기도 하다. 모든 이들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확인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실제로 우리의 삶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타인의 삶과 연결되어 있다. 이 때문에  암울한 현실을 우리의 힘만으로는 벗어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나는 오히려 어른들을 믿고 싶다. 88만원 세대의 문제는 20대들의 문제이긴 한데, 20대들 만의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조건적으로 어른들을 믿으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들은 우리에게 용돈을 듬뿍 쥐어주고, 심지어 기꺼이 기러기 아빠가 되는 자비를 베풀지만 정작 대한민국이란 사회가 작동하던 방식에 대해서는 문제를 제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같은 사실을 반성하고 작은 실천으로 이어질 때 우리는 그들을 용서할 것이며 우리 스스로를 용서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