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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호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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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KUMHO YOUNG ARTIST

LEE YOUNG MIN - L박사의 밀실

  

새로운 예술적 탄생을 갈구하는 예술적 가학피학성(Sado-masochism)


 

하계훈(미술평론가)


 

이영민은 드로잉과 영상작업을 중심으로 작품활동을 한다. 필자가 그의 작품을 처음 만난 곳은 일 년 반 쯤 전에 그가 작품을 출품한 졸업전 전시장이었다. 재작년의 미술시장 호황의 여파가 기성 화단을 넘어 전국의 미술대학 학생들에게까지 파급되어가던 시기에 열린 졸업작품전에는 이러한 미술계의 풍토가 어설프게 반영된 상당수의 작품들이 전시장을 메우고 있었는데 그 속에 걸려있던 이영민의 작품은 다른 작품들과는 차별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어서 필자의 눈을 끌었다.

그의 드로잉 작품은 다양한 동작과 상황을 보여주는 인체 드로잉으로서 특별히 정교한 수공을 들인다거나 인물의 모습에 명암 처리를 가하여 사실주의적 일루전(illusion)을 애써 주입하지도 않는 선묘 위주의 드로잉이었다. 누드의 남성이 다양한 자세로 그려진 작품은 성냥불로 그을리거나 못이 인물의 복부와 이마에 박히기도 하고 나무젓가락을 화면에 박아 넣어 주리를 트는 동작을 보여주기도 하는가 하면 끈으로 목이 졸리거나 음료수 캔 꼭지로 수갑이 채워지고 전기 충격을 당하기도 하는 가학적인 내용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작가는 작품 속의 이러한 인물상들을 창조하는 예술가로서의 역할을 하면서도 이중 자아로서의 또 하나의 가상 인물인 L박사(Liar)가 되어 그 인물들을 상대로 가학적 실험을 하는 셈인 것이다. 그런데 L박사가 위해를 가하는 대상 인물들은 곧 박사 자신의 복제인물로서 결국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학대를 가하고 자기 자신이 스스로에 의해 그 학대를 받게 되는 셈이다. 좀 복잡하다.

그렇다면 왜 L박사(작가)는 스스로를 창조하고 다시 그 창조된 자아인 피창조물을 괴롭히는가? 자신의 드로잉을 죽이는 행위, 즉 자살과도 같은 행위의 동기에는 작가로서의 고민과 이제까지의 자기를 죽임으로써 새로운 자아가 다시 태어나게 만드는 작가 나름대로의 탈출구가 모색되는 듯하다. 작가는 작업 과정에서 전통적인 조형원리와 표현형식으로부터 해방되는 자아와 가학적 행위를 벌이는 자아, 그리고 다시 그러한 폭력의 희생물이 되는 자아를 바라보며 복합적인 감정의 쾌감을 느끼며, 교육을 통해 강요되어 온 전통적인 조형원리가 주는 무거운 짐을 벗는 즐거움을 맛본다.

형식상으로 이러한 드로잉에서 이영민은 평면성과 입체회화의 문제를 실험하기도 한다. 종이 위에 그려진 드로잉 인물은 그의 윤곽을 따라 오려낸 틈새에 끈이나 나무 등과 같은 이물질들이 삽입되면서 화면에서 부분적으로 이탈하여 평면성을 벗어난다. 그리고 관람객들 역시 화면 속에 갇혀 있던 드로잉 인물보다 이렇게 돌출된 인물에서 보다 입체적이고 실제적인 느낌을 받게 된다. 마치 어린 시절 종이 인형을 오리고 옷을 갈아입히며 놀던 아이들이 그 종이 인형을 대화의 상대로 삼았던 것과 비슷한 심리상태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부터 작가는 작품에 암시적으로 동작과 생명을 주입하여 스스로 움직이는 입체회화를 시도한다.

<플레잉 보이(playing boy)> 연작은 이러한 배경에서 제작되는 인체 동작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일련의 드로잉이다. 이전의 드로잉 작품에서 다양한 이물질이 화면에 도입되었던 단계를 지나서 작가는 붉은 고무줄 하나로 드로잉 속의 인물이 움직임을 갖는 여러 가지 동작을 취하게 만들며 마치 그 동작들이 인물을 살아서 움직이는 것처럼 느끼게 만들려고 하고 있다. 작품 속에서 여러 가지 동작을 취하는 인물의 손과 발 등에 의해 늘어나고 있는 고무줄의 탄성으로 인해 비록 그들이 드로잉에 불과한 인물이지만 마치 살아서 움직이며 그들의 근력에 의해 고무줄이 당겨지고 있는 것 같은 생기를 느끼게 해준다.

이러한 <플레잉 보이>연작은 이영민의 특기라고 할 수 있는 영상작업으로까지 연장된다. 사실 길지 않은 작업 경력에서 이영민이 나름대로 성과를 축적해 온 분야는 영상 분야라고 할 수 있다. 이영민은 이미 재학 중에 대안공간 반디 비디오 페스티벌 대상, 아트센터 나비 모바일아시아 우수상, KT 디지털 콘텐츠 모바일 부문 우수상 등 적지 않은 상을 수상했으며 서울영화제 단편부문과 제천 국제 음악영화제 단편부문 등에서 자신의 동영상 작품을 상영하였다.

이번에 출품된 동영상 작품에서는 작가 스스로 혹은 자신의 신체의 일부가 화면에 등장하여 앞서 언급된 드로잉의 제작 과정의 일부를 보여주기도 하고 버퍼링 상태를 이용한 2 채널 영상을 통해 상이한 시간성을 다루는 작품을 보여주기도 한다. <불이, 춤춘다>라는 영상 작업에서는 이미지와 오브제가 불에 타면서 만들어내는 움직임과 소멸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오브제와 이미지의 관계와 존재의 의미와 소멸의 문제를 상기시켜주며 <변증법적 드로잉 기법으로 파헤친 인간매체 본성>에서는 나와 너라는 글자로 표현된 두 개체가 사랑을 나누다가 이별하는 과정을 애니메이션 기법으로 보여주며 개체간의 관계의 문제를 제기하기도 한다.

이영민이 드로잉이나 영상 작업을 통해서 채택하는 주제는 행복이나 희망과 같은 긍정적인 주제보다는 고통과 소멸, 이별과 같은 비극적이고 네가티브한 것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작가는 이러한 네가티브한 주제를 무겁게 다루지 않음으로써 관람자가 비극적 무드에 함몰되게 만들지도 않는다. 오히려 이명민이 제시하는 네가티브한 주제들은 비교적 가볍고 해학적이어서 주제의 반전을 불러오는, 그럼으로써 작가가 진정 원하는 것은 이러한 작품에 반영되는 네가티브한 주제를 뒤집어 보도록 만들어주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작년에 미술대학을 졸업한 이영민의 첫 번째 개인전인 이번 전시를 통해 작가는 예술의 형식 문제에서 존재론적인 문제나 사회적인 문제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주제를 다루고 싶어하는 듯하다. 이러한 작가의 관심이 이번 전시를 통해 관객들과 소통하는 과정에서 하나씩 검증되고 수정되면서 이번 기회를 통해 이영민이 프로페셔널한 작가로서의 본격적인 대열에 무사히 안착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