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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미 초대전

정종미의 “종이 부인”, 종이에서 태어나 종이 옷을 입다


 

                                                                                                                         김정희(미술사가, 서울대학교 교수)


 

I. “종이 부인”


 

“유화부인, 허황후, 선덕여왕, 신사임당, 허난설헌, 황진이, 논개, 매창, 명성황후, 유관순, 나혜석”. 이들은 기원전 1세기부터 20세기 전반기 사이에 살았고 역사서에 기록된 소수의 여인들 중의 일부로서 정종미가 이번 개인전에서 보여주는 인물들이다. 이 여인들은 이번 전시를 통해서 “역사 속의 종이 부인”이라는 이름의 기념비적인 모습으로 오늘의 관객 앞에 부활하게 되었다.

이번 전시 제목인 “역사 속의 종이 부인”은 정종미가 1994년부터 탐구하고 표현해 오던 주제와 소재, 작업 방식과 재료를 총체적으로 담고 있다. 그녀는 1970년대 후반 국내 대학에서 동양화를 공부하였다. 그녀가 교육을 받고 작품 활동을 시작한 시기의 학계와 화단에서는 수묵화가 한국적인 동양화를 의미했다. 한편으로는 화려한 색을 기피하던 조선의 문화를 한국적인 것으로 해석한 일본에 의해서 한국화의 특징이 왜곡됨으로써 한국화에서 색깔이  배제되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수묵화에서 문인의 성격이 강조되면서 종이, 붓과 먹과 같은 그림 재료들에 있어서 그것들의 물질적 특징들은 경시된 반면 상징적인 의미로 해석되면서 정신성 만 강조되고 고양되었다. 더욱이 1960년대 이후 문자 그대로 초고속으로 진행된 산업화를 통해 물질주의가 팽배해지면서 잃어가게 된 정신적 가치에 대한 향수가 증가하여 1970년대에 들어서는, 예를 들어 “단색조 회화”로 불리던 서양화 화단의 미술가들도 자신의 작품을 정신성의 표현이나 탐구로 해석하려는 경향을 낳았다. 무엇보다 1986년과 1988년에 서울에서 열린 국제적인 체육행사와 1987년의 “6.29 선언” 이후 도입된 해외여행자율화와 같은 개방정책을 통해서 외국인과 외국 문화와의 접촉이 늘어나자 그것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한국인과 한국 문화의 정체성에 대한 인식이 필요해지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가장 눈에 띤 변화는 한지에 대한 새로운 인식으로, 특히 이것을 다른 나라의 문화와 우리의 것을 차별화시키는 한국적 재료로 소개하고 홍보하는 행사와 전시가 전략적으로 진행되었다. 1990년에는 “한국한지작가협회”가 결성되었고, 같은 해 말에는 국립현대미술관은 한지를 전시 주제로 채택하여 70여명의 외국 작가들을 초대하여 한지로 작업하게 해 “제1회 서울국제미술제”을 개최했다.

정종미는 1994년 뉴욕으로 가 1년간 그곳에 있는 디외 도네 종이 공방에서 수학을 하였다. 그녀가 종이를 더 이상 선을 긋기 위한 바탕재로만 바라보지 않게 되고, 우리나라 전통 회화의 바탕재, 즉 소지(素紙)가 화선지가 아니라 도침(搗砧)1)한 장지(壯紙)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으며, 더 나아가서는 종이 제작 방식을 배우고 자신이 직접 만든 종이를 사용하게 된 배경에는, 그녀가 첫 개인전을 가졌던 1991년 <한국화 물성과 시대정신전>과 같은 제목의 단체전에 참가한 것을 보면, 1980년대 말 이후 국내 화단에서 일어난 종이에 대한 의식 변화와 한국적 정체성에 대한 각성도 크게 작용한 듯하다.

그러나 정종미의 종이의 물질성에 대한 관심이 상징적으로 ‘여성성'과 연결되면서 여성으로서의 작가 자신의 정체성의 탐구와 더 나아가서는 그녀 주변의 여성에 대한 관심을 거쳐 우리나라 “역사 속의 여성”의 발굴로 이어지는 “종이 부인”의 탄생에는 그녀가 머물던 1994년의 뉴욕 미술계의 분위기가 생산적인 토양으로 작용한 것 같다. 1993년 봄 뉴욕의 휘트니 미술관에서 열린 비엔날레는 그 전과는 전혀 다른 컨셉으로 이루어졌었다. 주류 제도권 미술관에서 배제되었던 소수민족 출신 미술가들과 젊은 미술가들이 초대되었고, 전시 이슈는 인종주의, 성애, 젠더, 민족적 정체성과 다문화주의였다. 정종미가 디외 도네 종이 공방에서 직접 종이를 제작해 보고 세계 각국의 종이들을 비교도 하며 도서관에 가서는 종이에 관한 서적들을 탐독하면서 우리나라 종이의 차이와 우수성을 발견하던 시기 뉴욕은 민족적, 성적 소수자의 정체성 강조라는 정치적 이슈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중이었다. 종이를 제작하는 길고 힘든 육체노동의 과정과 이를 통해 만들어지는 종이의 다양한 모습과 성질을 체험하면서 작가가 발견한 것은 자신이 누구이며 자신이 하는 ‘노동'의 의미였다. “은은히 품은 빛, 숨결같이 고른 표피, 체온을 받아 주는 푸근함. 하지만 다가갈수록 느껴지는 강인함, 질긴 근성.”(작가, 1999년 개인전 도록, 동산방) 이러한 종이의 특징들에서 작가는 자기 자신은 물론 그녀의 어머니, 더 나아가서는 미국으로 이주하여 살고 있는 한국 여성들의 모습을 발견하였다. 정종미는 이러한 신체적 , 심리적 , 문화적 체험을 “종이 부인”이라는 예술적 결과물로 승화시켰다.

정종미의 “종이 부인”은 작가가 직접 만든 종이 위에 표현한 여자 이미지 이상이다. 종이를 도침하여 그림의 바탕을 만들고, 그 안에서 이미지가 태어나게 하기 위해 여러 차례 바르는 안료와 아교도 직접 만들며, 종이와 안료가 결합되어 종이와 ‘부인'이 하나가 되어 ‘종이 부인'이 태어나도록 콩즙도 만들어 수차례 올리고 닦는 동안 작가는 부지중에 1960년대 후반 이후 미술사가들에게 중요한 담론의 핵심인 서구의 이원론을 만나게 된다. “종이 부인”이 처음 등장하던 시기인 1995년의 <종이 부인>의 여인 이미지는 종이 위에 그려졌다기 보다는 그곳에서 태어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여기에서는 배경과 형상이라는 위계적인 이분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작가가 브랑쿠지와 함께 좋아하는 조각가인 자코메티의 마른 인물 형상을 연상시키는 정종미의 여자 이미지는 화면을 배경으로 하면서 그것과 분리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 “부인”은 남성의 여성상을 재현하는 형태가 아니라 서양에서 여성적인 것으로 분류된 안료라는 물질이자 색채 자체다. 정종미는 색채가 우리나라 전통 회화에서 수묵화의 우위에 의해 축출되었으므로 그것을 부활시켜 전통을 복원하려했는데, 그 노력 역시 선적인 것을 남성적인 것으로, 반면 색채를 여성적인 것으로 분류하는 서구 미술 속의 이원론을 연상시켜 흥미롭다.

그러나 이 시기 정종미가 종이의 물질성을 여성적인 것으로 이해한 것은 여성주의에 대한 학문적 이해를 통해서가 아니라 한국 여성으로서의 삶이라는 작가의 사적인 경험을 통해서이다. 한편 그녀는 귀국 후 ‘우리 종이에 한국 여성을 담아 보려' 결심하고, 1999년에 이어 2004년 두 번째 “종이 부인전”을 개최할 때 ‘다음에는 역사 속의 종이부인들을 모실 계획'이라면서 ‘실제로 역사 속에 존재했던 여성들을 제단에 모시고 다시 한 번 존경과 경배의 자리를 마련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이를 통해서도 그녀가 우리나라의 종이를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것으로 인식하고 그것의 특징을 한국 여인의 성질과 동일시한 태도 역시 여성주의적인 의식보다는 한국인의 정체성의 탐구와 민족주의적 자부심에 더 가까운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점들이 정종미의 “역사 속의 종이 부인”을 서양의 여성주의자들이 역사 속에서 위대한 여성을 발굴한 것과 구별시키는 요소들이다.


 

II. “역사 속의 종이 부인”


 

“유화부인, 허황후, 선덕여왕, 신사임당, 허난설헌, 황진이, 논개, 매창, 명성황후, 유관순, 나혜석”. 이들이 정종미가 2004년부터 ‘존경과 경배의 자리를 마련'하고자 계획했던 “역사 속의 종이 부인”들이다. 서양의 여성주의 미술사에서 역사 속의 ‘위대한 여성'을 찾아 나선 것은 1970년대 여성주의 1세대의 방식이다. 이 세대 여성주의 미술사가 린다 노흘린은 1971년 1월 “왜 위대한 여성 미술가가 없는가?”(Art News)라고 질문한 뒤 1976년 LACMA에서 <여성미술가 1550-1950>을 개최하면서 남성중심의 역사 기술에서 생략된 여성미술가를 찾아냈다. 왜냐하면 여성주의의 입장에서 보면 남성 미술사가들이 여성미술가의 작품을 생략한 것은 ‘그들 자신들의 가치와 믿음을 강화시키고 타자의 경험을 억압하는 메커니즘들 가운데 하나'(Harmony Mammod)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종미가 경배하고자 ‘역사 속의 부인'을 찾아내는 것은 이것을 가부장적 사회제도와 남성 중심적 역사 기술이라고 해체하는 여성주의적 실천이 아니다. 그녀가 보여주는 ‘부인들'의 정체성이 다양하고, 또 이들 가운데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상대적으로 여성의 자주권이 강했던 고려 시대의 인물이 없고 그 반대인 조선시대의 여인이 다수인 사실을 통해서 유추할 수 있듯이 이 ‘부인들'은 남성들의 상상을 초시대적으로 충족시켜주는 여성상들이다.  작가가 이 ‘부인들'을 기념비적인 스케일로 그리는 것은 주어진 조건에 개인적으로 투쟁했던 각 여인의 삶에 대한 작가의 개인적인 송가이다. 하지만 작가가 각 ‘부인'의 삶과 연결된 모티브들을 활용함으로써 관객은 각 ‘부인들'의 삶을 그들이 살았던 사회와 연결시킬 수 있게 된다.

고구려의 시조가 된 아들(동명성왕, 재위: BC 37~BC 19)을 낳은 유화부인과 가야국의 시조인 김수로왕의 비였던 허황후(33~89)는 각각 ‘훌륭한' 아들과 남편을 둔 어머니와 부인으로 여성의 생물학적인 역할 때문에 칭송을 받는 여인들이다. 정종미는 <유화부인>의 위용을 삼단화 방식을 이용하여 양 날개에 시종들을 동반한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시종들은 전통적인 벽화 기법으로 그려졌다. 그들의 배치와 의상은 물론 안료가 벗겨진 듯한 묘사 방식은 7세기 말~8세기 초에 제작된 일본의 <다카마쓰즈카 벽화>를 임모한 듯이 보이게 한다. 이와는 달리 유화부인은 실제로 비단 옷을 ‘입고' 있어 실체감이 느껴진다. 유화부인과는 달리 성적 역할을 벗어난 업적을 통해서 역사 속에 기록된 선덕여왕(재위 632∼647)에 대한 숭앙은 꽃을 통해서 표현되었다.

조선 중기의 여인들인 허난설헌(1563~1589), 신사임당(1504~1551), 황진이와 (이)매창(1573~1610)은 모두 예술가들이다. 하지만 황진이는 그녀의 문학적 재능으로보다는 기생으로서의 성적 매력 때문에 문화 산업의 단골 소재가 되고 있고, 신사임당은 양반가문에 태어나 시도 잘 쓰고 그림도 잘 그렸으며 훌륭한 아들까지도 둠으로써 이른바 ‘슈퍼우먼'의  전형으로 회자되고 있다. 정종미의 작품에서 황진이는 꽃과 새가 가득한 무지갯빛 정원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관객을 정면으로 보고 있다. 이에 따라 마치 기생의 일상에 속하는 수놓기와 바느질을 암시라도 하는 듯 파스텔 톤의 비단 위에 염료와 종이로 ‘수놓은 듯한' 정원은 정작 그녀에게는 꿈속의 낙원이나 지나간 젊은 시절처럼 현실이 아닌 듯이 보인다. 반면 화려한 청색과 홍색 조각보 사이에 놓여 있는 매창은 관객을 향해 당당히 걸어오고 있는 듯하다.

정종미의 “부인들” 가운데 그들 자신의 실제의 삶을 가장 직접적으로 시사하는 모습으로 묘사된 인물은 논개다. 여전히 우리 사회는 “여필종부”를 가르쳤던 조선시대에 몰락한 양반 집안의 딸이 양반의 후처가 되었다가 그 남편이 죽은 후에 선택할 수 있는 길에 대한 질문은 생략한 채 적군의 장수를 ‘안고' 남강에 투신한 논개의 자살을 애국심의 산 표본으로 제시하고 있다. 정종미는 논개를 전체 폭이 6,3m인 푸른 색 화면의 중앙에 중력을 받지 않고 하강하는 커다란 새처럼 표현하였다. 그녀의 죽음은 다른 세계로의 비행처럼 보인다. 강은 푸른 안료로 물들인 모시로 표현되어 있는데, 천의 이음새가 만들어 낸 화면 속을 수평선들은, 푸른 색이 강물을 시사하듯이, 물결을 암시하는 듯하다. 작가의 <어부사시사>나 <몽유도원도>와 같은 작품에서 추상적 풍경이었던 이러한 단색조 화면은 <논개>에서는 강이라는 현실이 되었다.

이 작품들에서는 정종미의 “종이 부인” 그림에서 2004년경부터 나타난 새로운 작업 방식이 그녀 고유의 양식으로까지 진전되었다. “나”를 찾는 노력이기도 한 그녀의 한국화의 뿌리 찾기는 벽화와 불화도 그 기원에 포함시킨 한국화의 재료와 색채에 대한 학문적인 탐구로 이어졌다. 2001년에 출간된 『우리 그림의 색과 칠 - 한국화의 재료와 기법』은 그녀의 이러한 노력의 결과물이다. 이러한 재료와 색에 대한 연구는 2000년대에 들어서 그녀가 손수 만든 안료와 아교로 정교하게 물들이고 한천과 콩즙으로 색을 안착시킨 종이만이 아니라 모시와 비단을, 역시 직접 전분으로 만든 접착제로 꼴라주하여 제작한 서정적인 색면 추상화와 같은 <어부사시사>와 <몽유도원도> 연작들에서 실현되었다. 이러한 작품에서는 여러 차례 반복되는 염색 과정을 거치면서 안료가 물들면서 색이 깊이감을 지니게 된 종이와 천이 여러 층으로 꼴라주됨으로써 화면에서는 착시적인 깊이감이 생겨났다. 2004년 즈음에 제작된 <미인도>와 같은 작품들에서는 치마가 모시나 종이로 실제 치마의 주름이나 부풀어 오른 상태를 모방한 저부조로 표현됨으로써 깊이가 착시 효과로서가 아니라 실제로 표현되었다.

2004년 경에 제작된 “부인” 그림들이 지닌 3차원성은 부풀어 오른 치마 만이 아니라 여러 종류의 종이와 천을 여러 층 꼴라주해서 표현한 부인들의 장신구들을 통해서도 생겨났다. 이 장신구들은 이것들과 같은 시기에 등장한 여러 색깔의 ‘조각보'로 만들어진 화면과 함께 정종미의 그림들을 화려하고 다채로워지게 했다. 여러 색깔의 천과 종이로 이루어진 비슷한 크기의 사각형들을 화면에 비교적 규칙적으로 붙인 후 그 위에 다른 종이나 천 위에 그린 여인 얼굴을 오려와 붙이고 그 여인에게, 마치 어린이들의 종이옷 입히기 놀이처럼, 옷을 입히듯이 꼴라주한 작품들은 <보자기 부인>으로 불린다. 정종미가 화면을 조각보처럼 만든 것은 그녀가 한국화에서 복원시키고자 했던 색이 조선시대에 회화에서는 사라졌지만 궁중 의복과 민화, 그리고 조각보와 같은 여성의 물건에서 지속된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제작된 정종미의 부인 그림들은 입체적으로 되고 색깔이 화려해 지는 동시에 장식적으로도 되어갔다. 작가는 부인들의 의상의 화려한 문양들을, 특히 <명성황후>의 금박 무늬 의상에서 볼 수 있듯이, 무늬가 있는 천을 사용하거나 작가가 실제로 천이나 종이 위에 그려 넣음으로써 표현하였다. <명성황후>의 트레머리와 그곳에 단 장신구들은, <황진이>와 <논개>의 노리개와 마찬가지로, 작가가 직접 물들인 종이로 만들어 붙인 것이다. 이를 통해서 정종미의 “종이 부인들”은 1995년경 그들이 종이로부터 태어나던 것과는 달리 작가가 만든 종이옷을 입게 되었다. 이 작품들은 동 , 서양에서 모두 여성 노동의 산물이자 여성적 예술로 간주된 공예에 가까워졌다. 처음에 흙과 같은 누런 색을 띠고 종이 안에서 조심스럽게 출현하던, 그리고 이목구비도 형체도 불분명하던 “종이 부인”들이 12~3년 후에  화려한 의상을 입고 장신구로 치장하였으며 단호한 표정을 하고 스케일이 기념비적인 화면을 압도하는 “역사 속의 종이 부인”으로 변모하였다.

 

 

 

 

  역사속의 종이부인


                                                                                                                                           이  윤  옥

                      

1.

정종미의 작업실은 크고 넓었다. 큰 작업실 한쪽에 붉은 치마를 입은 여인이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여인의 입술이 치마처럼 붉었다. 나는 그 여인을 유심히 봤다. 열손가락에 반지를 끼고 푸른 물로 떨어지는 여자, 논개였다. 작가가 설명하지 않아도 금방 알 수 있었다. 비록 그 여자가 전해지는 이야기와 달리 한 남자를 품에 안고 있지 않아도, 그래서 두 팔을 머리 위로 쭉 펴고 있어도, 그 여자는 논개였다. 누구나 알 수 있는 우리 역사속의 여자 논개가 어째서 만세를 하나. 왜장(倭將)은 어디 갔는가. 이런 이의제기는 우스꽝스럽다. 그보다 우리는 죽음을 앞둔 만세 자세에서 삶을 주체적으로 산 여자의 희열을 느낄 수도 있으리라.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는 잉게보르크 바하만의 시구가 생각났다. 핵심은 내가, 그러니까 보통사람이 그 여자를 보는 순간 논개인 것을 알아차렸다는 데 있다. 

정종미는 그림 그리기를 자연(대우주)과 인간(소우주)의 소통과정이라 했다. 어느 한쪽이 강조되는 일방적인 흐름이 아니라 서로 들락날락하는 것이라고 했다. 정종미의 작업에서 몽유도원도나 어부사시사, 바람 같은 추상산수가 자연을 구현한 것이라면 종이부인은 인간을 구현한 것이다. 사실 범아일여(梵我一如)와 유사한 이런 생각은 우리에게 꽤 친숙하다. 정종미의 장점은 그런 주제적 차원에 형태적 차원이 결합돼야 하는 예술에서 한지를 질료로 선택해 꾸준히 작업과 실험을 이어 가는 데 있다.

종이부인은 정종미가 한지의 물성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질긴 생명력에 접히고 감싸 안는 유연성과 포용력이 결합된 것이다. 그것은 타자를 억압하거나 이기는 폭력적인 생명력이 아니라, 자기를 변형시키면서까지 낮은 곳에서 타자를 감싸는 생명력이다. 그래서 작가는 말한다. “종이부인은 이렇게 풍우와 서리를 참고 견뎌온 닥나무처럼 이땅의 야멸찬 역사를 온몸으로 살면서 끊임없이 자신을 거름으로 희생하고 모든 것을 아쉬움없이 내어준 모든 여성들에게 올리는 경배와도 같은 의식이다.”

정종미는 이번 전시회의 중심표제로 ‘역사속의 종이부인'과 ‘Women in history'를 놓고 고민했다고 한다. 과거 전시회에 쓰인 ‘종이부인'을 다시 가져오기가 조심스러웠던 것 같다. 예술가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자기모방이다. 자기모방에 빠진 작가의 작품은 대량생산된 공장 제품처럼 모두 동어반복이다. 어떤 작품이 자기모방인지 아닌지는 누구보다 작가 자신이 잘 안다. 내적 필연성이 다했는데도 시장이 원해서, 아직 새로운 표현방식을 찾지 못해서, 등 여러 이유로 기존 작업을 지속하는 작가들이 있다. 정종미는 그럴 수 없는 작가다. 한명의 종이부인이 탄생하기까지 그 작업의 지난함과 작품에 임하는 자세를 고려할 때 그렇다. 그녀에게 종이부인은 여전히 강력한 내적 동인을 갖고 있는 듯하다. 더구나 종이부인은 작가의 이름을 지우더라도 누구의 것인지 다 알 정도로, 정종미는 개성이 강한 작가다. 그녀가 예술가로서 오연한 자존심과 작품에 대한 무한책임을 버리지 않는 한, 종이부인이라는 표제의 사용을 주저할 이유가 없다.


 

2.

작업실 전면 유리문에 여러 작품들이 기대 서있었다. 두 작품을 치우자 명성황후가 나타났다. 나는 왼쪽에 논개, 오른쪽에 유화부인을 두고 명성황후와 마주섰다. 황후는 아름다웠다. 온화한 미소를 띤 얼굴과 우아한 자태, 그러면서도 당당하고 엄숙한 여인, 나는 황후와 오래 눈을 맞춘 뒤 유화부인을 거쳐 다른 방으로 들어갔다. 거기에 알록달록한 조각보를 곁에 둔 황진이와 매창이 있었다. 허난설헌은 가장 깊은 방에 있었다. 그렇게 방방이 작품과 재료들이 가득했다. 특히 재료실에서 만난, 제철에 염색해 놓은 온갖 종이와 천은 정종미가 얼마나 정직하고 고된 작업을 하는 작가인지 말해주고 있었다. 그런데 인고의 작업이 작품의 질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다. 예술가에게 장인정신은 매우 중요하고 기본적인 큰 덕목이지만 그것 자체로 이룰 수 있는 최고의 경지는 장인이다. 장인이 예술가가 되려면 거기에 재능과 세계를 해석하는 자기만의 예술관이 더해져야 한다. 장인정신이 없는 예술가가 흔하고, 그래서 장인은커녕 그 근처에도 못 미치면서 예술가로 자칭하는 사람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화가들은 모두 정직한 장인정신에 기초한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들에게서 느낀 것이지만, 질료나 작업과정에의 지나친 경도는 자칫 그 자체에 머물게 하는 함정이 될 수도 있다. “다듬이 위에서 도침을 하고 담채의 수간 안료를 아교와 수없이 바르기. 콩을 여러 날 불려 갈아서 콩즙을 짠 후 수없이 올리고 닦고 지우고 훔쳐내기. 그런 후에 다시 찢고 붙이고 뜯어내기.” 정종미의 작업은 하나하나가 모두 고난의 과정이다. 가늘고 여린 정종미의 몸이 오랫동안 그런 작업을 견뎌왔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녀가 고단한 노동에서 자신을 조금 놓아줬으면 좋겠다.

예술가의 욕망은 창조주의 욕망에 맞닿아 있다. 예술가는 그 어떤 것도 자기 존재를 정당화시켜줄 수 없음을 깨달은 사람이다. 정종미는 ‘삶이 허무해서' 인고의 그림 작업에 매달린다고 했다. 그녀에게는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이 그림이라는 뜻이다. 지금 정종미의 실존적 상황이 매우 긍정적임을 감안할 때, 이 말은 좀 뜻밖이었다. 그렇다면 작가에게 어떤 원초적인 정신적 외상(트라우마)이 있지 않을까.

지금까지 정종미의 인간에 대한 탐구는 종이부인, 여성에게 집중되었다. 그녀가 1996년에 그린 초기 종이부인 중 특이한 작품이 하나 있다. 그 그림에 작가는 이런 글을 덧붙였다. “뭔가 심술궂음이 얼굴에 가득하다. 짱구 이마, 쭉 찢어진 눈매며 얇은 입술에 독설이 가득하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내 곁에는 마치 여인열전 마냥 이런 모습의 여인이 순차적으로 등장했었는데 어리석게도 나는 그것을 숙명으로 받아들였고 늘 그녀들에게 시달리곤 했다.(…) 이 그림은 그녀들의 종합이미지라고 할까. 여성들이여 부디 여성다워지길….”정종미의 트라우마가 여성들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짐작케 하는 발언이다.


 

3.

나는 정종미가 핸드 드립퍼에 정성스럽게 내려준 커피를 마시며 그림 얘기를 나눴다. 커피는 미지근하고 싱거웠다. 문득 삶이 이 커피 같아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그러자 방금 본, 뜨겁고 강렬한 삶을 산 여인들이 생각났다.

예술은 자기 치유 행위다. 모든 예술은 예술가 개인에게서 출발한다. 예술가가 처음부터 거대담론 속에 거창한 목표를 갖고 시작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예술은 어떤 방식으로든 세계와 나 사이에 간극을 느낀 개인, 문제적 개인에게서 출발해 차츰 너에게로, 우리에게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저 그런 예술가의 그저 그런 작품에서는 이런 확산을 기대하기 어렵다. 정종미는 자신이 삶속에서 직접 겪고 접한 여성들을 통해 우리 여성의 역사를 그리고 싶었다고 한다. 그것은 작업의 출발점을 ‘내 삶속에서 내가 접한 역사'로 삼겠다는 정직한 고백이다. 문제는 자신이 접한 여성을 통해 한국의 모든 여성을 느끼고 표현하려는 욕구다. 이 말은 쉽지 않은 단계 이동을 암시한다. 정종미가 만난 여성들은 보통 사람들이다. 그녀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는 무명이며 익명이다. 그런 여성들을 통해 관상자가 느끼고 공감하는 데는, 그림이 주는 막연한 이미지와 여성성 정도로 한계가 있다. 그래서 정종미는 우리나라 사람이면 누구나 아는 여성을 통해 보다 구체적인 공감을 이끌어낼 생각을 한다. 그렇게 선정한 여성들이 유화부인, 허황후, 선덕여왕, 황진이, 신사임당 , 허난설헌, 매창, 논개, 명성황후, 유관순, 나혜석이다.

정종미가 한국 여성의 역사를 그리고자 인물을 고를 때 어떤 명확한 논리적 잣대를 적용한 것 같지는 않다. 그녀는 여성에 역사를 결합시키는 일이 버거웠다고 고백했다. 그래서 시대별로 잘 알려진 여성이면서 자신의 의도에 부합되는 인물들을 선택한 뒤, 그들에게 개인적으로 갖고 있는 이미지를 접맥했다고 한다. 편안히 골랐다지만, 이 인물들은 모두 자신들이 살던 시대가 강요하는 젠더이데올로기에 순종하지 않고 주체적인 삶을 산 여자들이다. 그들은 실존의 무게를 피하지 않고 감당해낸 여성들로, 매순간 선택과 책임의 연쇄로 스스로의 삶을 만들어간 여성들이다. 이번 종이부인들은 기명(記名)의 유명인들이다. 역사 속에 실재하는 그들은 자신들만의 분명한 개성을 지닌다. 그래서 그들의 얼굴은 다 다르다.  정종미는 기명의 유명한 여자들을 선택함으로써 평면적인 종이부인에 서사성을 부여한다.  이제 종이부인은 기명의 인물이 지닌 삶의 이야기, 그 두꺼운 겹과 층을 갖는다.

한국 여성의 원형을 찾으려는 시도, 역사속의 종이부인을 모색하는 작업이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되지는 않았다. 그것은 꽤 오래 전에 배태되어 숙성과 발효의 과정을 거쳤음에 분명하다. 맨 처음이 유화부인인 것은, 그녀가 고구려시조 추모대왕의 어머니이기 때문일 것이다(정종미는 1995년에 ‘유화부인'을 그리고, 2004년에 ‘유화부인'을 두 점 더 그린다. 특히 이번 유화부인은 2004년 유화부인 둘의 결합이라 할 수 있다). 정종미는 고구려 벽화색을 우리색의 근본이라 여기며 거기에 각별한 애정을 쏟는다. 그녀의 역사 속 실존여성에 대한 탐구가 신화 속 유화부인에게서 시작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다. 여기서 잠시 유화부인의 사랑에 대해 생각해 보자. 그녀는 추모대왕의 어머니이기 이전에 해모수와 금지된 사랑을 하고 추방된다. 그런데 이번 전시회의 11명 여성 중, 우리시대에 가장 가까운 나혜석이 유화부인보다 덜 신화적일까. 나혜석은 금지된 사랑과 추방에서 유화부인과 겹친다. 그녀는 말의 가장 넓은 의미에서 이미 신화가 된 인물이다. 그만큼 오해와 편견에 싸인 인물이다. 정종미는 종이부인 작업을 ‘제의'요 ‘경배'로 여긴다. 그렇다면 그녀는 자신의 작업을 통해 나혜석 같은 여성에게서 그 부정적 겹을 어떻게 벗겨낼지 고민해볼 여지가 있다.


 

4.

이번에 정종미는 주인물인 여성의 양옆에 그림을 배치해 하나의 작품을 만든다. 마치 부처의 좌우에 놓인 협시불처럼 주인물 곁에 배치된 그림(편의상 ‘협시화挾侍畵'로 부르겠다)은 주인물의 정체성과 깊은 관련을 맺는다. 예컨대 신사임당 곁에는 그녀가 그린 그림이 놓이는데, 이는 무엇보다 신사임당이 예술가, 특히 화가였음을 말해준다. 유화부인  곁의 고구려벽화 인물들, 명성황후 곁의 붉은 색, 논개 곁의 푸른 색, 허난설헌 곁의 오방색, 선덕여왕 곁의 지화, 매창 곁의 색보자기, 유관순 곁의 바람 등도 다 마찬가지다.

정종미는 명성황후 작업에 3개월간 매달렸다고 했다. 무엇보다 명성황후에 대한 정보들 자체가 감당하기 힘들어 내부에서 자꾸 저항이 생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려운 명성황후 작업을 끝냈을 때, 정종미는 하나의 단계를 넘어선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사실 처음에 그녀는 명성황후의 배경에 시해장면들을 그릴 생각이었다. 그러다 가장 자기다운 명성황후에 대해 고민한 끝에 시해장면을 붉은 화면으로 바꿨다. 처음 생각대로 시해장면들을 그렸다면, 명성황후는 그 의미망이 많이 축소됐을 것이다. 명성황후의 바뀐 배경과 협시화에는 온통 빨강이 넘실댄다. 정종미는 빨강으로 명성황후가 살았던 난국을 나타내고 싶었다고 한다. 실제로 빨강은 상징사전에 따르면, 밝음, 시작, 벽사, 사랑, 태양과 더불어 핏빛 위험, 전쟁을 뜻한다. 또한 빨강은 왕의 색이어서 홍포는 왕의 옷이다. 명성황후는 홍포를 입지 않았지만 빨강 한가운데 앉아 왕의 위엄을 갖추고 있다.

협시화에서 알 수 있듯, 우리는 이번 전시작들에서 추상산수와 종이부인의 조화(調和)와 지화기법의 적극적인 도입에 주목해야 한다. 정종미는 이번 전시회에서 추상산수의 색은 물론 바람까지, 이전 작업들과 종이부인을 유기적으로 결합시킨다. 유관순의 협시화는 바람이다. 바람기는 꼭 남녀의 어지러운 애정에만 관계된 것이 아니다. 신념이든 무엇이든 보이지 않는 힘에 들려 돌아가는 모든 것이 바람기다. 바람기가 강할수록 삶은 온통 그 바람기에 먹힌다. 그런 점에서 유관순 또한 엄청난 바람기의 소유자가 아닐까.

종이꽃, 지화는 정종미의 종이에 대한 관심이 또 하나 우리 전통과 닿은 결과다. 지화는 고려 때 불교의식을 시작으로 길흉사에 두루 쓰여서, 무속, 장례의식과도 깊은 관련을 맺는다. 작가가 종이부인 연작을 우리나라 여성에 대한 지극한 경배요, 제의라고 말한 점에 유의할 때, 지화는 그 주제의식과 무관하지 않다. 형형색색의 종이꽃에 싸인 꽃상여는 무채색의 지극한 슬픔을 채색의 지극한 아름다움으로 바꿔놓는다. 정종미가 종이부인으로 꾸미는 제단과 제의 역시 그런 것이리라.

정종미는 고난에 찬 삶을 산 여성을 ‘무채색의 시절을 말없이 견디어 온 여성'으로 표현한다. 그녀에게 무채색이 절망, 고통, 참고 견딤이라면, 채색은 희망, 행복, 즐기고 누림이다. 그러니 우리는 무채색이 주조를 이룬 허난설헌의 곁에 배치된 오방색의 의미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 수 있다. 작가는 무채색의 시절을 견딘 허난설헌에게 채색의 삶을 회복시켜줌으로써 경배하는 것이다. 오방색을 위해서 정종미는 허난설헌의 배치를 다른 여인들과 달리 한다. 우리는 허난설헌을 감상할 때, 우리그림을 보는 방식대로 오른쪽 주인물에서 시작해, 차례로 오방색을 따라 이동해야 한다. 검은 어둠속에서 한발 내딛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 허난설헌. 우리는 그녀를 따라 걷기 시작한다. 그 걸음은 무겁지 않다. 우리의 걸음은 색색의 그림위에 하나, 둘, 셋, 넷, 바람의 흔적으로 남는다.

정종미는 2005년작 ‘녀인'에서 천의 독특한 표현법을 보여준다. 천은 종이의 변형임에 분명하지만 그 종류와 사용방식에 따라 종이보다 입체감이 훨씬 더할 수 있다. 유화부인은 적절하지만, 정종미의 그림에서 광택이 있는 천의 도드라진 느낌이 가져올 효과에 대해서 좀 더 생각해 봐야 하겠다. 그녀 역시 경우에 따라 어떤 천을 어떻게 사용할지 앞으로 더 깊은 숙고를 하리라 믿는다.


 

5.

정종미는 삶에서 여성성이 극대화될 수 있는 여자, 그런 이야기를 가진 여자라면 한국 여자에 머물지 않을 것이며 또 그래야 한다. 예술이 한 개인의 지극히 사소한 욕망이나 결핍 등에서 시작해 모든 사람의 욕망이나 결핍을 위무하는 데까지 나가야한다면 말이다. 또한 여성으로서 지난한 삶과 끈질긴 생명력은 특정한 공간과 시간에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정종미의 작업이 과거 우리 여성에 그치지 않을 두 징후가 있다. 먼저 마릴린 먼로를 그린 작품들(‘마릴린'1995, ‘Mrs. 마릴린'2004)과 파마머리에 양장을 한 현대여성을 그린 작품들이 그것이다. 사실 마릴린 먼로는 정종미가 우리 역사에 앞서 최초로 작업을 시도한 실존인물이다. 그 이유는 작가가 의식했든 아니든 먼로를 여성성의 강력한 구현자로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마릴린 먼로! 성녀(聖女)와 창녀 사이의 여인…. 누구는 그녀를 성녀라 하고 누구는 창녀라 한다. 그녀 자신 역시 그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다 사라져갔으리라. 그러나 그녀뿐 아니라 모든 여성은 성녀이자 또한 창녀라는 생각이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나는 그녀를 좋아했다.”

모성성은 자연에 가깝다. 거기에는 무엇보다 타자가 상정돼야 한다. 모성성에 개체로서의 여성, 인간이 결합될 때 비로소 정종미가 생각하는 보다 큰 여성성의 윤곽이 나타난다. 여성성으로 포용과 인내만을 강조할 때 자칫 젠더 이데올로기의 충실한 수용에 그칠 수 있다. 거기에 생물학적인 성을 고려한 인간적 욕망과 그 억압으로부터의 자유 같은 항목이 반드시 고려돼야 하는 이유다. 먼로에 가까운 우리 인물이 나혜석이다. 나혜석의 소비되는 이미지가 그렇다. 마음이 아프지만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지금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실체보다 이미지니까. 그래서 우리는 사진으로 본 실제 나혜석과 동떨어진 정종미의 그림에 저항하지 않는다. 정종미가 그린 나혜석은 얼굴이나 모습이 나머지 10명의 종이부인들과 많이 다르다. 헝클어진 파마머리에 이목구비가 분명하지 않은 검은 얼굴, 왜소한 몸. 우리는 정종미 덕택으로 나혜석처럼 새로운 이미지의 명성황후와 허난설헌 등을 얻었다.

정종미가 과거 우리 여성을 위한 제의에 머무르지 않을 또 다른 징후는 작가가 “종이부인 시리즈 중 최초의 작업”이라고 설명한 그림에서 찾을 수 있다. 그 그림에는 민소매 옷에 구두를 신고 두 손을 모아 쥔 채, 두 다리는 쩍 벌린 우스꽝스러운 자세의 종이부인이 있다. 그녀와 함께 입꼬리를 있는 대로 당겨 올려 웃고 있는 ‘초인(草人)'이 보여주는 해학성을 눈여겨보자. 정종미가 예전에 ‘호모 루덴스'라는 표제의 그림을 그렸듯, 고통만 있는 삶은 없다. 더욱이 예술에서는 놀이성이 가장 우선이다. 예술가에게는, 고통이 클수록 그것을 날것 그대로 드러내지 않고 승화시키려는 자세가 중요하다. 해학은 고통에 대응하는 가장 승화된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이번에 나는 정종미가 우리 역사에서 불러낸 종이부인들과 속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러는 한편, 그녀에게 내재된 기분 좋은 해학성을 감지하며 또 다른 작품과의 설레는 만남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