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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호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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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세개인전

금호미술관 3층

김영세, 추상과 패턴


서성록(안동대 미술학과 교수)

누구나 김영세의 작품을 보면 말쑥하고 잘 정돈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불필요한 군더더기나 찌꺼기를 발견할 수 없고, 화면 전체는 촘촘하게 짜여져 있다. 오차없이 만들어진 설계의 도면을 보듯 공간의 구석구석에다 거기에 걸맞은 조형인자를 배치하였다. 화면 위에 하나하나의 면들을 섬세한 감각과 조형어휘 구사력으로 가다듬어 걸러냈다. 


김영세의 그림을 바라보고 있자면 ‘구성'이란 말이 절로 떠오른다. 화면을 전체적으로 이끌어가는 직선과 면, 색채가 상호 조화를 이루어 하나의 구조물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조형의 집'이라고 할까, 회화의 요인들이 잘 숙성시켜 구축적인 공간을 배양했다는 말이다. 건축가가 원자재로 골조를 세우고 외장을 입혀 건물을 완성시키듯이, 화가는 선과 면, 그리고 색채를 엮어 그림을 완성시킨다. 그러니까 그에게는 선과 면, 색이 ‘원자재'요 그것을 얼개짓는 구성은 건축가의 ‘골조'가 되는 셈이다. 


작가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평면과 기하학적 형태의 호응관계를 연구하는데 신경을 쏟았다. 가령 2002년에 열린 ‘단출한 만남'이라는 개인전에서는 하얀 바탕위에 살짝 휘어진 선을 얹혀 마치 낱개의 곡선들이 유영하는 듯한 작품을 발표하였다. 흰 바탕 속에 뭉툭한 곡선들이 우아한 자세로 미동하는 그림이었다. 당연히 바탕은 밑칠이 층층이 보이도록 주의했고, 그리하여 시간의 프로세스에 의한 편차 또는 투명성을 갖도록 했다.


그런데 근작에서는 바탕이 따로 없다. 이미지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둘을 합쳐 하나로 묶어낸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추상적 패턴'이 눈에 띈다. 화면은 ‘줄무늬의 공연장'이 된다. 줄무늬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끊어지고 겹쳐지며 접히고 꺾어진다. 형형색색의 칼라에 여러 패턴이 어울리면서 다양한 표정을 선사하고 있다. 동일한 폭으로 곱게 뻗은 색 막대는 윤곽에 있어 어디 한군데 흐트러짐이 없이 반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런데 줄무늬가 그림의 전체는 아니다. 가령 화이트, 엘로, 블랙, 코발트, 블루 등으로 착색되어 있는 줄무늬들은 그 자체로서 의미를 갖기보다 바탕과 어울려 한 쌍을 이루도록 틀지어 있다. 즉 외톨이나 힘겨운 선봉장이 아니라 전체의 일부로서, 통일의 중요한 계기로서 작용하고 있다. 관객들이 그의 작품을 볼 때 처음에는 패턴을 따라갈지 모르지만 얼마 안 있어 자신도 모르게 공간을 여행하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색띠 역시 공간 전체를 꾸미기보다 머나먼 곳을 여행하듯 떠돌고 있기 때문이다. 마이크로 칩의 회로도 같이 생긴 그것들이 바깥에서 주어진 어떤 정보를  전달하고 있는 것 같은 이미지를 풍긴다. 그러나 그것을 확인할 어떤 암시도 없기 때문에 이점을 확신할 수는 없다. 어쨌거나 형상과 바탕은 어떤 입체적인 일루저니즘을 만들기보다 현실적 동일성을 꾀한다.   


그런데 그 회로처럼 생긴 모양이 흥미롭다. 하나도 똑같은 것이 없으며 변화무쌍하게 변화한다. 방향도 제각각이다. 세워진 것, 비스듬히 누운 것, 꼬꾸라진 것,  고개를 치켜든 것 등. 어느 것 하나 반복적인 것이 없다. 관객에게는 구경거리가 풍성하니 좋고 작가로서는 패턴의 변주를 꾀하는 재미가 있다. 아마 ‘도식적인 구성'보다 다양한 형세와 교차에서 오는 ‘다채로운 구성'을 즐기는 의도 때문이 아닌가 싶다.


감상자가 어떤 연상을 하는 것은 자유지만, 사실상 색띠는 어떤 구체적 대상으로 보여지기를 거부한다. 그 자체가 모티브로 사용되었긴 하나 다른 이미지로 발전되거나 다른 어떤 것을 연상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색띠가 평면 가운데 펼치는 순전한 시각화를 선보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김영세는 회화의 평면성에 충실을 기하고 있다. 그에게는 평면이 회화의 출발이자 근간이 된다. 
평면과 색띠는 서로 호응하면서 연속적인 내재적 리듬을 유발한다. 그리고 그 리듬의 진동을 타고 잔잔한 여운을 실어낸다. 여과없이 쏟아내는 격정과는 구별되는 순수시각적인 여운이다. 그의 그림을 통해 살며시 안겨오는 안정된 리듬에서 질서잡힌 감각과 상쾌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은 필자뿐만이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