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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호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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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원개인전

금호미술관 2층

모더니즘 이후, 그리고 라이프스타일 (After Modernism and Life-style)



이상원의 회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한결같이 원거리에서 바라다보이는 우리의 군상이다. 과거 히에로니무슈 보쉬나 우첼로, 브뤼겔처럼 한 사람에 대한 주관적인 느낌과 감상을 멀리하고 인간사를 객관화시켜 무언가의 의미를 불어넣고자 할 때 종종 쓰인 방법이다. 인간에 대한 묵시적 시각을 담거나 전쟁과 기아에 대한 공포, 우의와 교훈을 표현하고자 할 때만 인간은 객관적으로 대상화 되었다. 반대로 왕이나 유명한 인물, 성서의 내용과 신화를 그릴 때에는 철저히 주체를 중심에 부각시켜 주관적 심상과 센티멘탈리즘, 낭만적 극화의 스포트라잇을 부여했다. 따라서 지금 보면 다빈치나 뒤러, 라파엘이 보쉬나 브뤼겔보다 대중적으로 훨씬 성공할 수밖에 없었다.

이상원이 지금 이 시대, 특히 시장주의와 상업주의의 예술 속에서 살아남기 편리한 후자의 방법을 과감히 버리고 전자를 택한 이유를 묻는 것은 그의 회화를 이해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는 이 시대가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묻는 것으로 네러티브의 첫마디를 던진다. 첫 번째로 던질 수 있는 질문은 아무도 더 이상 역사나 이상, 혹은 이념이 무엇인지 묻질 않는다는 점이다. 

 

이런 것을 따져 물으며 추구하는 일이란 자기를 이해하고 자신을 둘러싼 모든 환경의 맥락을 이해해야만 하는 혹독한 과정이다. 이 커다란 대아(大我)의 ‘나'는 대문자로 시작하는 ‘나(I)'이다. 대문자로 시작하는 알파벳 ‘I'가 상징하는 이상(Idea)이나 이념(Ideology)은 이전 세대의 사람들의 현실이자 낭만이었다. 반면 지금 세대 사람들은 소문자 ‘i'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진정 우리는 이데아에서 벗어나 작은 ‘i'의 인터넷(internet) 속에서 정보(information)를 찾아 해갈하며 아이팟(i-pod)의 음악소리에 파묻히거나 이미지(image)에 사로잡혀 사람들과 거리를 두며 살고 있다. 즉 자기 삶의 최대만족을 일(work)에서가 아니라, 라이프스타일(life-style)에서 찾는 현상이 바로 이 시대의 삶이다. 이 라이프스타일을 이끌어주는 두 개의 수레바퀴는 시간과 취미이다. 그리고 이 수레를 이끄는 동력은 당연히 경제적 여유이다. 이 동력을 얻기 위해 모두들 각자의 모든 에너지를 기꺼이 발산한다.


이상원은 내가 알기로 라이프스타일이라는 새로운 풍경의 문제를 예술로 끌어들인 거의 첫 번째 작가이다. 라이프스타일, 즉 누가 보람되며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는가라는 문제보다는 과연 누구보다 경제의 괴로움에서 벗어나 여유롭고 멋진 삶을 꾸려보는가라는 화두는 지금 모든 사람들에게 다가온 긴박함이지만, 사실 이 용어는 예술가에게서 비롯된 말이다.


이 라이프스타일을 이해하기 위해 간단히 예술의 역사를 도식해 보자. 원래 예술이라는 용어는 협소한 의미에 지나지 않았다. 문화라는 용어가 훨씬 보편적이었다. 문화영역은 의미의 영역이었으며 세계를 의미 있게 만들기 위해 애써왔던 가상적 형식의 노력으로 이해하면 간편하다. 이에는 예술(art)과 제식(ritual)이 대표적인 주축이었으며 그 누구라도 언젠가는 체험하며 두려워할 죽음이나 비극과 같은 존재론적 곤경에 대한 대항마였다. 이때의 과학은 자연에 대한 통합체를 이루려는 수단이었고 종교는 각각의 시대마다 문화의 통합체를 이루려는 추구였다. 이 통합체를 해하려는 대상에 대해 종교는 용납하지 않았다. 그 후 서구에서는 아우슈비츠가 동양에서는 제국주의가 각자의 종교를 무력화시킨다. 더 이상 종교 내 문화는 존속치 않고 기성의 규범과 양식을 타파한다. 이 새로운 시도를 우리는 모더니즘이라 배웠다. 모더니즘은 부르주아 세계관에 대한 맹렬한 반발이자 20세기 서구와 동양의 창조적 기치와도 같았다. 테마로서 규범 특히 부르주아 규범에 대한 반발, 양식적으로 심리적 거리의 소멸, 내용과 형식보다는 미디어 자체의 추구 등 세가지로 크게 요약할 수 있다.


부르주아 규범이란 그리스 시대의 문화우위론의 바탕으로 비롯된 기독 로마 문명의 카테고리이며, 양식이란 모름지기 이 규범을 상식으로 삼아 모든 예술을 미적으로 극화시킨다는 내용과 형식이다. 당연히 이 상식과 상식의 틀 사이에 심리적 거리가 발생하며 생각하며 학습할 시간이 필요하다. 동양에서도 유불선 사상 내의 규범과 상식 아래 진행된 문화라고 보면 서구와 그 과정의 역사가 별반 다를 바 없다. 다만 모더니즘의 승리의 아이러니는 규범을 장악하던 통치계급이 자신들의 반발이던 모더니즘을 수용하며 따랐다는데 있다. 통치계급이, 보다 부드럽게 표현하면 사회 엘리트들이 자신들에 부합한 새로운 사상을 만들 새로운 여력도 에너지도 이유도 갖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엘리트들은 모더니즘에 보기 좋게 복수를 한다. 이 복수는 자신들이 더 나은 사상이나 예술형식을 발견해서 얻어낸 것이 아니라, 모더니즘을 자신들의 주특기인 경제와 상업의 올가미에 몰아넣어 영원히 빠져 나오지 못하게 했다는 점이다. 라이프스타일은 기존의 규범에 개의치 않고 사는 삶, 규범의 질서에 편승하지 않으려는 무심함, 즉 모더니스트와 같은 삶을 일컫는 용어였다. 이러한 예술가나 누릴 수 있었던 삶은 최근의 젊은 세대들에게 확산되었고 이들은 기존체계에의 편승이나 반발이라는 이원적 양태를 새롭고 극적으로 개발해냈다. 타인과의 적당한 거리 두기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거리를 두고도 외롭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경제력을 확보하는 것이다. 이러한 세태는 예술가까지 도리어 이상하게 만든다.


우리는 수없이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말을 믿고 학습했다. 그러나 그것의 실체가 있는지에 대해서 사실 아무도 모른다. 다만 이러한 정황에 대한, 이러한 시장성에 대한 반격과 재반격의 지리멸렬일 뿐인 것 같다. 다만 글로벌리즘이라는 자유경제론의 찬양용어가 문화계에 침투해있을 뿐이다. 경제학자 슘페터(Joshep Shumpeter)의 “재화의 교환은 성배의 값싼 대체물이다(The stock exchange is a poor substitute for the Holy Grail)”라는 문구처럼 모든 사상과 기치는 경제라는 괴물에 몰려있으며 이념과 믿음은 괴물에 대체되어있다. 현재 예술의 화두 역시 경제용어 글로벌리즘이다. 모더니즘도 포스트모더니즘도 아니다. 

 

미적 가치나 규준이나 출생지도 없고 다만 스톡 교환만 되면 그것으로 훌륭하다. 예술시장이 이미 단일화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예술의 형식과 의미는 그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니클라스 루만(Niklas Luhmann)과 같이 진보한 학자 역시나 이미 피로감을 드러낸 예술을 가리켜 아름다움/아름답지 못함이라는 이원론적 코드 내에서의 소통의 관철이라고 규정한다. 즉 입에 맞는 음식, 입에 맞지 않는 음식을 가리는 것이지 음식을 섭취하면서 몸에 좋고 자연과 신에 감사하는 마음의 괴테 고전주의는 지금 통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단 예술이 자율권을 갖게 되면, 다른 영역이 그것을 보증하지 않고 스스로 보증하게 된다. 그것은 자기고립과도 다르며 그렇다고 예술을 위한 예술(l'art pour l'art)도 아니다. 더 이상 예술은 가능성이 확장된 영역을 미적으로 조절해서 사회를 회복하려는 야심을 갖지 않는다. 이제 예술의 기능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이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상원은 물론 위에서 내가 말한 재미 없는 이야기들을 염두에 두고 작업한 것이 결코 아니다. 다만 나 역시나 모르고 살아왔던 이 시대의 정황과 언제나 묻고 싶었던 이 시대 예술이 지니는 의미를 이상원의 회화는 극도로 잘 유도해주었다는 기쁨을 그의 관람객과 함께 하고 싶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이상원의 회화는 모더니즘의 3대 악명과는 완연히 다르다. 첫째 미디어에 극도로 집착하는 모더니스트가 아니다. 둘째 엘리트 규범에 대한 반격과 재반격의 기치로부터 자유롭다. 셋째 심리적 거리의 제거, 즉 직접적 노출 및 감각에의 직접적 호소를 자제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지금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현재의 라이프스타일을 차례로 명상한다. 산과 바다, 풀장, 리조트, 연이 날리는 한강, 스키장에서 모두들 즐겁게 보이며 무엇을 고민하며 왜 사는지에 대해서는 서로 알 필요가 없다. 너무 편해 보이고 유쾌하며 서로 방해 받지도 구애 받지도 않는 평화로움. 우리 이전 세대가 꿈꾸어 봤을 법한 풍경. 그러나 이러한 풍경을 가능케한 놈, 글로벌리즘이라는 괴물의 그림자를 이상원은 은연중에 연출한다. 


대문자 ‘I'의 ‘대아' 혹은 ‘자아(self)'에서 소문자 ‘i'의 인터넷(internet)과 아이팟(i-pod)이 주는 고립(isolation)으로의 이행과정과 나아가 에고(ego)의 대문자 ‘E'가 갈수록 이-머니(e-money)나 이-캐피탈(e-capaital)과 같은 경제(economy)에 심적으로 혹사되어(exhaust) 간다는 염려를 이상원의 회화에서 발견하는 것은 나뿐일까? 정말이지 회화에서 통례적으로 볼 때 사람들을 작게 그리며 원거리 시점을 적용한 사례의 회화들은 무언가 많은 생각에 잠기게 만든다는 공통점이 있다. 보쉬의 회화에는 신이 내리는 경고라는 해석과 그가 악마의 숭배자라는 두 가지 해석이 동전처럼 따라붙는다. 피터 브뤼겔의 회화는 인간의 우매함에 대한 우화라는 해석과 당시 신권에 대한 조롱이라는 두 가지 해석이, 우첼로의 전쟁화는 전쟁의 공포와 이에 대한 우려라는 해석과 당시 집권자를 전쟁신으로 묘사했다는 이중적 해석이 뒤따른다. 역시 이상원의 그림에서 나는 평화로워 보이며 유쾌하기까지 한 그의 화면에서 더욱 치열해지는 내 다음 세대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아픔이 보인다.

이진명 (미학, 큐레이터, 아트스콜라 상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