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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은선 개인전

우리강산을 지키는 플라스틱 나무 이야기


이영준 <이미지비평가> 

...중략
 전은선이 플라스틱 나무 찍은 사연을 얘기하다 보니 서두가 한참 길어졌다. 그렇게 길게 플라스틱 나무 영접하는 법에 대해 얘기한 이유는 그냥 얘기하면 인정하지 않고 바로 내쫓아 버릴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건 애초에 나무가 아니니 논할 가치도 없어!' 하는 식으로 말이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플라스틱 나무도 나무다. 생강나무나 꽝꽝나무나 층층나무가 나무이듯이 말이다. 플라스틱 나무를 바라보는 전은선의 시선은 그래서 양가적이다. 별로 반갑지는 않은데 그렇다고 싹 무시할 수도 없고, 그래서 자꾸 찍다보니까 왠지 재미 있기도 하고, 슬금슬금 정이 가기도 하는 것이, 먼데서 볼 때처럼 마냥 흉측하기만 한 것도 아닌 것이다. 하긴 사람 사는 꼴이 다 뻔한데, 마당에 천년 묵은 지리산 주목을 옮겨 심어 놓는다고 그 사람이 주목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플라스틱 나무가 우리의 공간과 시각을 가득 채운다고 해서 우리의 몸과 마음이 플라스틱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 눈이 발광 다이오드가 되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가장 근본적으로 변하는 것이 있다면, 나무와 자연에 대한 우리의 고정되고 단일한 믿음이 깨진다는 것이다. 몇몇 사진가들과 나무애호가들, 학자들이 나무에 대한 사진이 잔뜩 들은 책들을 냈지만, 그 책들 속의 나무들은 한결 같이 존경과 사랑을 가득 받고 있는 모습으로 찍혀 있다. 전은선이 그렇게 찍을 수 없는 이유는 플라스틱 나무가 밉쌀스러워서가 아니라, 그걸 대하는 자신의 태도가 양가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그 나무들을 한결 같이 삐딱하게, 멀리서, 조그맣게, 주변화되어 있는 모습으로 찍었다. 사실 찍었다기 보다는 자신이 생각하는 플라스틱 나무의 문화적이고 심리적인 위치에 따라 사진의 배치를 그렇게 하였다. 그녀가 전에 화원을 찍었을 때도 그랬고 카페 노릇을 하고 있는 가짜 배를 찍었을 때도 그랬다. 그녀의 시선은 항상 양가적이었다. 껴안기는 흉측하고, 버리자니 현실의 일부이고. 
   ‘사진적으로' 처리한다는 것은 그런 양가적 태도에서 오는 곤란함을 치유하는 방식이다. 쉽게 말하면 사진적 스타일에 힘 입어 어정쩡한 상태에서 오는 곤혹감을 감추자는 것이다. 그것은 프로이트가 말한 fort/da 게임과도 비슷하다. 엄마가 직장에 가고 없는 어린 아이가 실뭉치를 던졌다 받았다 하며 ‘fort/da(있다/없다)'라는 말을 반복한다. 이 아이는 엄마의 부재와 현존을 실뭉치의 부재와 현존을 통해 시뮬레이션 하면서 엄마 없는 결핍감을 해소한다는 것이 프로이트의 해석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fort/da라는 언어로 그것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즉 아이는 언어화함으로써 엄마의 부재라는 고통스럽고 당혹스러운 사태에 대처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전은선은 우리의 풍경을 메우는 흉측한 물건들의 현존과, 우리가 꿈꾸는 원형의 자연의 부재라는 이중의 사태에서 오는 고통을 사진의 스타일이라는 언어로 시뮬레이션함으로써 대처해 나가려 하고 있다. 사진으로 찍어서 적절히 배치하고 잘 다듬어서 프린트로 뽑아서 벽에 걸면 마음에 안정이 오는 것이다. ‘그래, 저것은 원래 저럴 수 밖에 없었어' 라는 식의. 물론 사진의 스타일이 언어와 같지는 않지만, 한 가지 공통적인 것은 붙잡을 수 없는 사물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두는 수단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사진은 시각적 묘사의 수사법을 통해, 언어는 언어기호의 분절화(articulation)를 통해 사물을 붙잡아 둔다. 물론 언어에는 언어 바깥의 영역이 있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 혹은 말로 다 했다고 생각했는데 말과 말 사이에 생긴 간극 같은 것 말이다. 사진의 언어에도 바깥이 있다. 전은선이 찍은 플라스틱나무를 뭐라고 규정하기 어려운 이유가 거기 있다. 그녀는 플라스틱 나무를 규정성이라는 끈에 묶어 두기 위해 사진을 찍은 것이 아니라, 도대체 어떻게 대해야 하고 뭐라고 언급해야 할지 알 수 없는 그 양가적이고 애매한 상태를 토로하기 위해서 사진 찍은 것이다. 전국민의 플라스틱 나무를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