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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전 - 금호영아티스트

탈신체화된 시선과 환상이 거세된 스펙터클 “사물에 대한 전(前)인간적인 시선이 곧 회화의 시선의 표식이다.” -메를로-퐁티- 시간에 풍화되지 않는 좋은 작업이란 대개 그것을 감추면서 드러내는 미묘함에 있다. 이는 그리스인의 진리 개념을 떠올리게 한다. 진리에 대한 그리스어 표현인 알레테이아(aletheia)는 ‘탈은폐성'이라 번역될 수 있는데, 그것은 ‘은폐되어 있지 않은 상태, 은폐가 제거된 상태'를 의미한다. 이것은 결국 진리가 은폐와 탈은폐의 변증법적 메커니즘의 방식 속에서 태어난다는 사실과 통한다. 푸코에게 보낸 마그리트의 편지 내용 중 “우리는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더 중요성을 부여할 근거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역도 마찬가지입니다. … 정말로 중요한 것은 사실상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의해 환기되는 긴밀한 긴장관계일 것”이라는 언급이 떠오르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이다. 김수영의 작품은 왜 은폐와 탈은폐의 개념을 환기시키는 것일까? 김수영이 다루는 대상은 극도로 장식이 배제된 차갑고 건조한 근현대 건축물들이다. 그녀는 성장 위주의 도시개발 계획의 일환으로 건조된 도시의 건축물을 관찰하고 파악하기는 하되, 그것을 재구성하지는 않는다. 사실 김수영의 건축물들은 현대미술의 미시담론이 그렇듯이 낯섬과 낯익음의 변증법적 관계의 대상 혹은 무관심적 주목의 대상으로서의 그것에 가깝다. 따라서 그녀의 회화는 단순히 도시 속 건축물의 구조를 관찰하고 묘사한 것이 아니며, 현대 도시문명의 비판이나 풍자를 담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르꼬르뷔지에 류의 근대건축물에 대한 오마주라고 볼 수도 없으며, 또한 철저히 미적이며 조형적인 요소의 집결체로서의 건축물을 묘사한 것만으로도 해석될 수 없다. 그것은 김수영의 작품이 리얼리즘적인 동시에 추상적이며, 풍경화인 동시에 정물화이며, 회화인 동시에 건축이라는 경계선의 개념에서 논의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탈신체화된 시선 김수영에게 건축물은 도구적 사물이 아니라 미적 향수의 대상인 동시에 무관심적 주목의 대상이다. 작가는 외부환경에 대해 자기 자신의 감정을 이입하거나 내적 동요를 표현하는 대신, 지적인 반응으로 대응한다. 이를테면 순수한 이성으로 감정적 낭비 혹은 망상들을 잠재우고 형식의 엄격성을 견지하면서 견고하고 구조화된 화면을 탄생시킨다. 이 때 작가는 회화적인 깊이감보다는 선과 색면이라는 형식에 치중하면서 사선의 역동성과 같은 명증한 측면과 더불어 색을 통한 평면성의 측면을 노정한다. 김수영의 화면은 육체성이 배제된, 즉 탈신체화된 시선으로부터 산출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의 작품에는 소위 메를로-퐁티가 세계의 살(flesh)이라고 즐겨 부르는 존재가 누락되어 나타나게 된다. 촉각과 같은 다른 감각의 사용이 철저히 배제된 시각적인 것의 순결화라고 해야 할까? 이러한 주체와 대상과의 ‘관조적 거리'는 그 사물을 휴머니티가 배제된 ‘스펙터클'로 만든다. 이처럼 김수영의 작품은 질적인 주제들보다는 오히려 추상적이고 양적으로 개념화된 공간과 구조가 더욱 흥미롭게 나타난다. 그런 까닭에 그녀의 작품들은 탈내러티브화(de-narrativization)나 탈텍스트화(de-textualization)의 회화방식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 김수영의 이런 태도는 마치 추상미술의 형식주의의 주요개념인 ‘의미 있는 형식'(클라이브 벨)을 만들어내는 듯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의미 있는 형식이란 재현된 대상이 불러일으키는 미적 가치를 부정하고, 형식 그 자체를 목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6가지 순수 형식요소, 즉 선, 양감, 공간, 명암, 색채, 시선에 따라 표현된다. 이를 모티프로 하는 예술가들은 삶은 더 이상 재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형식을 통해 순수성을 찾아야 한다고 보면서 작품을 초월해있는 일련의 특성을 추구한다. 그들은 예술작품이 일상적 삶에서 느끼는 정서가 아닌 순수형식으로부터 환기되어 삶의 경험으로 환원될 수 없는 독특한 정서를 불러일으켜야 하는 것으로 믿는다. 이러한 과정에서 예술가는 삶과 예술을 철저히 분리하고 일상적 삶을 넘어 초월적 실재를 추구하는 등 형이상학적으로 승화된 정서를 체험하게 된다. 김수영의 회화가 리얼리즘적 재현을 근간으로 한다고 해도 그린버그류의 모더니즘 회화의 평면성과 매체성을 환기시키는 것도, 그녀의 회화가 리얼리즘적인 소재에도 불구하고 심리적이고 서사적인 내용을 제거해나감으로써 추상화되기에 이르렀기 때문일 것이다. 클로즈업과 블로우업 김수영은 사물을 파편화시켜 확대(blow-up)시키기는 하지만 그것을 클로즈업(close-up)하지는 않는다. 클로즈업은 대상에 대한 주체의 지배가 두드러지는 것으로 특정한 방향성을 강요하고 화면의 구심점 기능을 하면서 화면을 응축시키지만, 블로우업은 오히려 비가시적인 외부로의 지향성과 더불어 무한대의 화면으로 확산하는 미적 체험을 환기시킨다는 점에서 변별된다. 어쩌면 블로우업은 건축물이라는 사물, 그것도 유니트가 강세인 근대건축물이 갖는 깊이의 부재의 한계를 상쇄시키는 하나의 방법일지도 모른다. 이를 포함하여 김수영의 화면 속의 조형적 요소는 매우 균질적이며 민주적인 시각성을 부여받는다. 김수영의 작품은 이러한 측면에서 프랑스 영화감독 자크 타티(Jacques Tati)의 영화 <플레이타임 Play Time>(1967)을 연상시킨다. <플레이타임>은 몇 년 전 필름포럼이 기획한 제4회 시네클럽: “보는 것의 영광과 퇴폐”라는 세미나와 함께 마련된 영화로, 현대의 도시적 경험의 포착을 포함하여 모던한 라이프 스타일에 대한 풍자를 중심으로 근대의 시각과 시각성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던 꽤나 독특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 영화는 특별히 유리와 창문, 철재와 골조로 이루어진 근대건축 양식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한편, 극단적인 디테일과 투명한 심도 등 다양한 시각적 요소로 가득 차 있어 시종일관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혼란스럽고 난감했던 영화다. 이미 데카르트적 원근법이 소멸되고 파노라마적 시각으로 펼쳐진 영화의 화면은 전경만이 아니라 중경, 후경을 동시에 살펴야만 그 묘미를 파악할 수 있을 정도다. 어떤 것이 특별히 중요해 보이지 않는 만큼 관객은 그 어떤 것에 집중하도록 종용되지 않으며, 그저 관객의 선택과 투사에 의해 화면은 그 풍부함을 보장받게 된다. 이러한 시각적 민주성이 시선의 중심을 소멸시킨 김수영의 화면에서도 고스란히 담보된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표면과 심층: 무의식과 반복강박 김수영은 자신의 시각적 체험의 개별적인 특성을 음미하고 유형화하되, 그것을 알레고리화하거나 상징화하려는 유혹에 저항한다. 그것은 그녀가 자신의 화면에 심리적이며 서사적인 요소의 개입을 충실히 배제하는 것과 연관된다. 김수영에게 이러한 심리적이며 서사적인 요소에 대한 혐오는 거의 일종의 억압과 강박으로 느껴질 정도인데, 그녀의 작업이 사실 대상의 재현 그 자체로만 보여지지 않고, 미적 조형요소의 단일한 결합체로만 여겨지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김수영이 지속적으로 다루는 건축물의 반복적 유니트는 환상이 거세된 강박적인 세계를 보여준다. 그것은 어떤 세계를 은폐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데, 은폐는 억압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환상이 거세된 화면이란 심리적이고 서사적인 세계를 지속적으로 배제하면서 강박적일 정도로 반복적인 유니트를 묘사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어쩌면 기계적일 정도로 건조하게 재생산되는 반복적인 구조적 특성 -그것들이 나름대로의 다양한 변주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은 실재(the real)를 감추는 베일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반복은 실재적인 것이 재현될 수 없으며, 반복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라캉에 따르면 반복은 복제가 아니다. 그것은 지시대상의 재현이나 순수한 이미지, 즉 독립된 기표의 시뮬레이션이라는 의미에서 의 복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이런 건축물을 표현하는 방식에서 드러나는 반복은 외상적인 것으로 이해되는 실재적인 것을 가리기(screen) 위한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말이다. 사실 우리는 하나의 문화가 외부의 이미지를 고수할지라도, 개인적이고 예술적인 형식을 나타낼수록 그 아래에 무언가 의미심장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앤디 워홀의 반복적인 화면은 그저 무관심한 표면일 수도 있지만, 그것을 근본적인 어떤 것 즉 실재를 가리는 베일로 작용하고 있다고 해석한 할 포스터(Hal Foster)의 언급을 신뢰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맥락에서 김수영의 화면 역시 실재를 가리는 동시에 드러내는, 표면이 곧 심층이 되는, 은폐와 탈은폐의 경계적 맥락을 지니는 어떤 것은 아닐까? 인간에게 심리적 외상(trauma)의 결과는 반복적인 꿈으로 나타나며, 이런 강박적인 반복은 쾌락의 원칙과 관련된다. 김수영은 자아의 과도한 긴장을 통제하고 그것을 파편화시키는 방식으로 자신의 트라우마를 해소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녀 역시 강박적인 반복을 통해서 욕망의 충족을 지속적으로 지연시키며, 죽음충동을 삶충동으로 바꾸는 것은 아닐까? 김수영의 작품을 보면서 이제는 무서운 깊이 없이는 아름다운 표면도 존재할 수 없게 되었다는 니체의 말과, 표면이 곧 심연이라는 들뢰즈의 말을 오버랩시켜 본다. 이들 아포리즘은 김수영의 작품과 진정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일까? 유경희(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