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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호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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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일선 개인전

맹일선의 그림은 얇은 저부조의 벽화를 연상시킨다. 질감을 지닌 물질들이 일정한 면적을 이루며 공간을 점유했고 그 사이로 가늘고 날카로운 선들이 다채로운 표정을 짓고 서식한다. 채워진 부분과 여백이 긴장감을 야기하며 어둡고 흐린 부분에는 쉽게 보이지 않는 기이한 자취들이 단서처럼, 문자처럼 놓여있다. 짧고 가늘고 혹은 길고 둥근 선, 선회하는 선과 물결처럼 구비치는 선, 무언가를 그리려다 만듯한 자취들, 마치 암각화에서 볼 수 있는 상징이나 기호를 연상시키는 모호한 흔적, 몸짓 같은 것들이 새겨져있다. 물성의 강조와 흰색, 검은 색, 회색으로 이루어진 모노톤과 점, 선, 면이란 평면회화의 가장 기본적인 조형요소로 그려진 그림은 그만큼 심플하고 절제되어 있다. 물질을 흥미롭게 연출하는 한편 선의 쓰임이 자유롭게 운용되는 이 그림은 실은 작가의 개념적인 상징체로 연출된 것이다. 현대미술은 물질의 연금술사로서의 작가란 존재가 그 물질을 빌어 어떤 의미체계, 상징 기호를 만들어내는 일이 작업임을 보여주었다. 이전에 물질이란 외부세계를 재현하는 도구로서의 위상에 머물렀다면 현대미술은 재현에 종속된 물질, 매체를 자신의 내면을 시각화하는 알레고리로 삼았던 것이다. 따라서 물감과 붓질, 캔버스란 공간, 그림 그리는 행위, 제작 시간 그 모두는 절대적인 의미를 부여받게 되었고 그것을 보여주고 인식하는 일이 작업이 되었다. 그러니까 근대에 들어와 개별적인 개인들이 저마다의 시간 속에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그 시간에 의미를 부여하며 시간이 절대적인 존재로 격상됨에 따라 미술 역시 시간의 전적인 지배를 받거나 시간이 그만큼 중요한 주제로 부각되었다는 얘기다. 맹일선 또한 시간이란 주제를 다루고 있다. 작가에 의하면 시간을 탐구하는 것은 자기 자신과의 만남을 뜻한다고 한다. 삶이란 시간 위에 체중을 올려놓는 일이다. 우리는 객관적인, 물리적 시간을 살지만 그 시간에 대한 체험은 개별적이고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사실 모든 작업은 주어진 공간에 시간을 기록하고 시각화하는 일이다. 자신의 시간체험을 화면에 부여하고 각인하는 것이다. 결국 모든 작업은 한 작가가 그 작업을 행한 시간의 궤적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순수하게 표현되는 셈이다. 전통적인 시간관이 순환론적 이었다면 서구를 통해 받아들인 근대적 시간관은 물리적, 기계적, 직선적 시간관이다. 그러나 시간은 심리적이며 개인적 편차가 존재한다. 절대적이고 기계적인 시간을 벗어나 사람에 따라 다르게 경험되는 시간의식 속에는 과거, 현재, 미래가 유연하고 탄력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현재는 과거와 미래 사이의 접점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이 지향하는 관심의 지평으로 나타나며 과거와 현재, 미래는 고정된 위치에서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물건의 병렬현상이 낳은 층들과 같은 것이 아닌, 현재의식의 관심의 폭과 깊이에 따라 과거와 미래의 영역도 달라진다. 현재란 그래서 과거와 미래가 함께 공존하며 그 양쪽의 시간이 동시에 스며들고 겹쳐지는 기이한 시간이다. 그렇게 때문에 인간은 객관적 시간 속에서 생활하면서도 타인과는 다른 개별적인 시간을 접할 수 있다. 맹일선은 이런 시간인식을 물질을 빌어 형상화했다. 자신의 주관적인 시간체험을 시각화한 것이다. 객관적인 시간에서 존재하다가 점차 주관적인 시간으로 몰입해 가는 작업 과정을 보여주는 작가는 경험을 통해 다양하게 변화하는 빨라지기도, 느려지기도, 정지하기도 하는 주관적 시간을 여러 형식을 통해 다양하게 표현하고자 한다. 자신을 규정하는 삶의 조건 역시 시간이며 작업 역시 그 시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자신의 존재 이유를 시간 안에서 찾아보려고 한다. 작업은 객관적인 시간과 주관적인 시간의 공존을 보여준다. 캔버스 위에 테라코트를 고르게 펴 바른 후 건조까지의 적당한 상태를 기다린다. 적당히 마르면 그 위에 다시 핸디코트를 바른다. 여기서 건조속도는 물리적인 시간, 객관적인 시간, 그러니까 물의 흐름과도 같은 비가역성을 띈 물리적 시간이다. 이 시간을 놓치면 원하는 작업을 할 수 없으므로 작업은 그 시간에 종속되는 편이다. 테라코트 위에 핸디코트를 덧바른 상태에서 날카로운 도구를 이용해 드로잉을 하는데 모두 흰색을 지닌 물질의 표면을 긁어낸 선과 파인 흠이 자연스레 선을 만들고 이렇게 희미하게 드러나는 선들은 우리들의 일상적인 삶의 양식 속에서 쉽게 드러나지 않는 주관적인 시간을 의미한다. 또한 그 드로잉은 이미 준비한 에스키스에서 취한다. 과거의 것인 에스키스가 현재의 공간 안에 재현되면서 한 공간 안에 과거, 현재, 미래가 뒤엉켜 조형적 언어로서 시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과거는 기억할 수 있는 시간으로 확산되고 미래는 예상할 수 있는 시간으로 확산된다. 그래서 다양한 방향성을 지닌 선들은 시간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화면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원형상은 시계나 천체의 이미지를 암시한다. 또한 무의식적인 욕망이나 과거의 회상, 내밀한 추억, 앞날에 대한 막막한 동경 등 시간과 연결된 여러 흔적들이 별처럼 흩어져있고 풀처럼 자라나며 암호처럼 비밀스럽게 떠있다. 아울러 작가가 다루는 색은 무채색 계열이다. 차갑고 중성적인 이 색상은 흰색, 검은색, 은색, 그리고 자신의 피부색 등이다. 작가에 의하면 흰색은 미래지향적인 색이며 피부색은 사적인 색, 내면의 색이자 검은 색은 과거의 시간을 상징한다. 은색은 검은 색 위에 펄을 사용해 생기는 색으로 빛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검은 색은 펄로 인해 은색으로 변하고 이는 마치 과거 위에서 피어나는 현재와도 같은 생생함을 갖게 된다. 그것은 이미지들을 더욱 두드러지게 하기도 하고 은폐하기도 하는데 이는 작가에게 기억하고 싶은 부분과 그렇지 못한 시간을 의미한다고 한다. 결국 작가는 “주관적인 시간을 통해 보고, 느끼며 경험하는 모든 것들을 물리적인 시간과 함께 과거로 흘려 보내는 것이 아니라 현재로 끌어올려 과거, 현재, 미래가 한 공간 안에서 존재하도록 한 것이다”(작업노트) 맹일선의 그림은 주관적인 시간체험에 대한 시각화다. 다만 여기서 시간의 체험은 특별한 이미지를 지닌 것이 아니라 물질과 점. 선. 면과 같은 추상회화의 언어 및 작가의 작업행위의 궤적으로 국한된다. 이는 시간에 대한 개념적 회화, 시간체험의 기호화가 맞물린 그래서 독특한 드로잉이자 재료와 기법 모두가 엄밀한 체계 안에서 작동되는 작업이다. 박영택(미술평론, 경기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