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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호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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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경채 10주기전

류경채(1920-1995)는 한국 근대회화의 아카데미즘을 실현한 대표 작가로 꼽힌다. 그의 이름 앞에는 늘 ‘한국적 서정주의' ‘서정적 추상'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서양 추상과는 다른 독자적 작품 세계를 열어 보인 작가로 한국 미술사에 자리매김한 그에게는 늘 자연이 주된 관심사였다. 이번 10주기전은 일종의 회고적인 성격을 띤 것으로 10월 20일부터 30일까지 금호미술관에서 시작하여 11월 30일까지 대한민국예술원 미술관으로 이어진다. 이번에 문을 연 류경채 미술관에서는 초기작품과 유품 위주로 전시한다. 이번 전시는 초기에서부터 만년에 이르는 선생의 작품 세계 전모를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유족이 소장하고 있는 작품 외에 각 미술관에 흩어져 있는 작품을 한자리에 모은 것으로 류경채의 개인적 역정뿐 아니라 우리 미술계에 차지하는 그의 위치와 그 영향의 관계를 연구할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독특한 표현기법과 감각적인 색채로 시정에 깃든 작품을 펼쳤던 류경채는 일제 치하였던 1940년의 제19회 조선미술전람회 때부터 1949년 제 1회 국전을 거쳐 1981년 제30회 마지막 국전에 이르기까지 작가로서 국전과 더불어 살고 활동하며 국전의 발전과 그 활성화에 기여한 사람이 류경채 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시종일관하여 「국전」을 중심으로 활동한 화가라는 말이기도 하거니와, 실제로 그는 제30회로서 1981년에 막을 내리기까지 국전이라는 보루를 끝까지 지킨 화가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류경채가 단순히 「국전화가」로서만 머물러 있었다면, 그 자체 만으로서는 그다지 큰 우리의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문제는 그가 국전을 무대로 활동하면서도 그 울타리에 결코 안주하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에 있으며, 오히려 국전의 폐쇄성을 부수려는 노력을 펼쳐왔다는 사실이 그의 작가로서의 공헌과 함께 그가 우리 화단에서 차지하고 있는 독자적인 위치를 뒷받침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1957년에 이루어진 「창작미술협회」의 창립도 그와 같은 의미에서 그 의미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와 같은 사실은 비단 「국전화가」로서의 그의 위상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작품세계 또한 또 다른 많은 동료화가들과도 분명한 획을 긋고 있는 것이다. 류경체가 제1회 국전에서 영예의 대통령상을 수상했다는 사실은 위에서도 언급한 바 있거니와, 그 수상작품을 비롯하여 그 후의 50년대에의 작품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그의 작업은 국전의 상표와도 같은 아카데미즘적 사실주의에 일찍이 빠진 적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설사 그가 국전을 끝까지 지키기는 하였으되, 보다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조형 세계를 꾸준히 추구해 왔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며, 그와 같은 맥락에서 오늘날 그가 귀착한 추상세계를 우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기록적인 활동이 우리나라의 미술 발전에 부정할 수 없는 밑거름이 되었음을 오늘날 우리 미술계는 공감하고 있다. 그는 제 1 회 국전에서 명예롭게 대통령상을 수상하고 추천작가 ․ 초대작가 ․ 심사위원 및 운영위원장 등을 역임했으며, 그 자리와 역할을 지키고 빛내면서 국전의 육성과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일찍이 일제치하에서 미술수학을 하기 위하여 일본 동경으로 유학을 가서, 선구적인 의식을 보였던 류경채이다. 그렇기에 그는 1940년 제19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당시 조선인 화가로서의 예술성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다.일제치하에 폐쇄되었던 조국의 문화예술 분야에 빛을 보이기 위해 류경채 같은 선구적 의식을 지닌 작가들은 헌신적인 예술 활동과 계몽적인 봉사를 한 바 있다. 이와 같은 의욕과 의지는 그에게 있어서 바로 미술교육과 연결되어 교육계에 투신하게 되었고 이화여대를 거쳐 서울대에서 25년간 후학 양성을 위해 노력하였고, 대한민국 예술원 회장을 역임하는 등 한국의 문화예술계의 중심에서 활약하였다. 한편, 류경채의 미술발전을 위한 헌신적인 봉사활동은 1957년 이후 1995년까지 그가 구심점이 되어 30년간 이끌어 온 창작미술협회의 존재와 그 위치의 중요성으로 다시 한번 평가된다. 미술계 저변의 확대와 유망한 젊은 작가들의 창작의욕을 북돋아주고 한국 현대미술의 방향모색과 우리 고유의 퍼스낼리티를 추구하여 창작미협의 활동을 오늘날까지 지속되게 하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류경채는 아시아국 14개국이 참여한‘아세아 국제전'을 조직하여 매년 교류전을 갖게 함으로써, 한국미술의 국제적인 위치와 그에 대한 인식을 갱신하고 고양시켰다. 남달리 각별하게 후배와 제자를 양성하고 우리 미술의 발전을 위하여 진력한 류경채는 솔선하여 활력적인 창작활동을 보여줌으로써 모범적인 작가상을 제시해 왔다는 사실이 또한 지적된다. 그것은 개인전 ․ 초대전 ․ 동인전 ․ 창작미협전 ․ 국제전 ․ 원로작가전 등 수 많은 대표적인 전시회를 통하여 입증되고 과시되었다. 이렇듯이 그는 1940년 조선미술전람회 출품을 필두로 공식적인 창작활동에 참여하여 1995년타계 전까지 48년간 지속적이고 생산적인 기록을 우리 미술계에 남겨주고 있으며 또한 빛내 주고 있다. 류경채는 자신의 심상을 통해 자연을 바라보았다. 그의 자연은 감각적이고 서정적이다. 때로는 숭고한 정신세계를 일관성 있게 표현했던 우리나라 대표적인 화가다. 이번 전시는 자연에 대한 감동을 작가의 숭고한 의식세계를 통해 한국적 서정주의로 표현한 그의 화업을 재조명해 보고자 하는 의도로 기획되었다. 그의 작품 세계를 살펴보자면 초기 구상에서 비구상을 거쳐 인생의 후반부에는 절대추상으로 변모해갔다. 그의 화풍은 변했으나 변화의 근저에는 언제나‘자연과의 교감'이 흘렀다. 호박, 감, 해바라기, 산길, 소녀, 길·등 40-50년대의 작품은 주로 자연을 대상으로 삼아 사람과 자연과의 만남을 목가적인 서정시로 흠뻑 담고 있다. 그것은 자연의 화려하고 풍요로운 의상에 감명된 감흥의 세계가 아니라 자연의 미묘한 변신, 헤아릴 수 없는 오묘한 전조에 도취한 사람과의 만남의 세계이고, 또한 동조의 시가 담긴 세계이다. 그렇기에 작품은 자연에 가해진 인간의 소산으로 되고 있다. 1960년부터 류경채는 추상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구상에서 멀어져 형태의 소멸을 보이기 시작한다. 대 전환기의 작품은 도심지대'(60년)로 그는‘당시 서울풍경을 그리면서 그림이 잘되지 않아 화폭을 지워보니 오히려 원하는 그림이 됐다.'며 추상은 마음에 비치는 심상의 에센스를 표현하는 것'이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그의 추상은 명상적인 눈이 대상의 피상을 박탈하여 비유적인 변모의 독자적인 현실로 전환시킴을 뜻한다. 그것은 구상의 잔해이며 감각적인 세계의 파괴이다. 마치 자연 전체가 그 자율적인 질서에 의해서 영원한 변모를 거듭하며 고정적인 형상을 보이지 않듯이, 기타 지상의 형태도 이 원리의 예외가 될 수 없다는 류경채의 비전인 것이다. 보통, 종교적인 관점에서의 정신세계에 입각한 추상은 비대상적이라 하지만 60년대의 류경채의 추상세계는 비구상의 표현이다. 70년대 들어 순수 추상을 전개한 그는 입춘, 설날, 생일날, 독백, 단오...등 자연의 서정과 따뜻함을 잃지 않는다. 후반부터 류경채의 작품은 단편적인 상형성도 보이지 않는 무존의 세계로 향한다. 그때까지의 단편적인 상형에 베일을 덮어씌운 이중적인 표현은 명상적인 무와 존의 차원으로 전환한다. 무는 현실적인 구상성에 대한 불신에서 이루어진 것이고, 존은 불신을 낳게 한 작가의 독자적인 현실이다. 이 현실은 자연에 물리적인 구상성을 갖게 한 실존적인 힘이며 정수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변화무쌍한 현실을 있게 하는 힘이라 할 수도 있고, 사과 한 개에 대한 1이라는 수치의 차원도 생각해 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의 사과는 일시적인 현실인 데 비하여 1이라는 수치는 영원한 실존성이다. 1970년대 후반부터 전개되는 색면 구성의 시기를 들 수 있다. 이 때의 작품으로는 마치 극락세계의 길을 보여주듯 빛이 가득한 화면을 보여주는 <나무아미타불>과 기쁜 날들에 대한 기억을 작품화하여 전체적으로 밝은 느낌을 주는 <날>시리즈(1979-87)가 있으며, 이 대담한 전환의 징후는 이미1978년 작품〈나미아미타불〉을 통해 극적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 뒤를 이은〈날〉(1979년)을 거쳐 그 3년 후의 동일한 표제의 작품에 이르러 류경채의 추상세계는 그의 조형 논리의 하나의 극점을 이루는 것이다. 그 세계를「미니멀적」이라고 했을 때, 그것은 보다 원초적인 의미에 있어 그러하며, 1970년대의 서구적 맥락에서의 그것이 아니라, 예컨대 말레비치의 절대주의의 세계와 맞닿는 세계에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말레비치가 주장하는 절대주의는 동양적인 의미의 「허」의 사상과 직결된다. 그리고 그 「허」의 세계는 바로 순수지고의 감성의 그것이기도 하거니와, 그것은 또한 절대적인 정신의 세계이기도 한 것이다. 여기에서는 일체의 감각적인 요소는 배제된다. <나미아미타불〉이라는 작품의 표제 자체가 매우 시사적이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곧바로 불교의 「공」의 세계를 생각 하며, 또 실제로 이 작품의 핵을 이루고 있는 것은 화면의 거의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 중앙 부분의 「여백 공간」이다. 그리고 그 여백이라고 하는 것이 사실은 「충만된」공의 세계요, 단순한 여분의 공간이 아니며, 이 작품에서는 감각적인 요소, 즉 색대가 오히려 변두리로 밀려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화면공간의 특성은 그 이후의 작품에도 그대로 지속적으로 전개되어 가며 동시에 새로운 요소가 가미된다. 그 새로운 요소란 다름 아닌 대칭적 구성요소, 그것도 최대한도로 억제되고 집약된(그러한 의미에서 미니멀적인) 것이기도 하거니와, 그 구성을 규정짓는 것은 순전히 전체와 부분의 대비를 통한 색면 공간에 의한 구성이다. 이 색면적 공간 구성은 그러나 결코 규격화되거나 획일적인 것이 아닐뿐더러, 대칭적인 그 구성의 틀도 단색이 지배하는 색면의 보조적인 구실을 하는 데 그친다. 요컨대 화면의 대칭적 구성은 그 화면 전체를 단일 평면으로 커버하는「전면구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며, 예컨대 1978년의〈날〉은 타원형 평면의 전면 구성의 작품이요, 1982년의 〈날〉은 네모꼴 평면의 전면 구성의 작품이다. 그리고 그 구성은 곧 일종의 무한공간, 또는 비물질적인 투명한 정신 공간에 열려지고 있으며, 바로 여기에 80년대의 류경채 회화의 본질적인 특성이 있다 할 것이다. 축전시리즈(1988년-91년)와 염원시리즈(1992년-95년)는 완전한 기하학적 형태로 절대추상세계를 반영한 작품이다. 감각적인 세계를 철저히 배제하고 선과 면에 의한 최소한의 조형요소로 절대추상세계를 보여주는 <축전>과 <염원>시리즈를 축하고 있다. <축전>시리즈는 완전함을 상징하는 원을 모티브로 하여 자연 현상 이면의 원형(原形)을, 작가가 타계 직전까지 제작한 <염원>시리즈는 이전 작품에 종교적이고 성스러운 모티브인 십자형, 머름모 등을 추가하여 절대자에게 귀의하고자하는 염원을 보여준다. 이렇듯이 류경채는 초기 수상작품인 <폐림지 근방>에서 정적의 서정적 시흥의 자연관을 보이고 계속 명상적인 관조를 통하여 자연과 인간과의 교감을 간결하고 제약된 색채와 형상의 선적인 요소를 교차된 리듬으로 고양시키며 자연의 피상성을 박탈하여 항구적인 요소만을 표상화 한다. 그의 이러한 변조적인 자연관은 존재의 항상성에 대한 꾸준한 추구와 직관적인 표출형식을 60년대 작품부터 70년대 작품에까지 반영시키고 있다. 이와 같은 흐름은 앞서 잠시 언급한 바 있듯이, 그가 자연에 품고 있는 깊은 애정 때문에 비록 자연을 계속 변형시키고 동적으로 영상을 구성하고 있으나, 수목 ・ 새 등 가시적으로 생각게 하는 요소들을 구도에서 완전히 배제하지 않고 있다. 때로는 극단적으로 단순화하고 또는 철저하게 변형을 하고 있으나, 거기에는 항상 자연의 원초적인 영상이 잠재하고 있다. 류경채는 자신의 심상을 통해 자연을 바라보았던 작가이다. 그의 자연은 감각적이고 서정적이기도 하며, 때로는 숭고한 정신세계를 나타내는 한편, 절대적인 완전함으로 다가오기도 하였다. 그는 인간과 자연의 합일을 꿈꿨던 화가였으며, 또한 여러 단체전을 통한 작품 활동으로 젊은 작가들의 창작의욕을 북돋우고 우리나라 미술계의 발전과 함께 했던 장본인이었다. 그런 까닭에 작가의 이번 전시(염원)를 통해 우리나라 근· 현대 미술사를 다시 한번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보도자료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