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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호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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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년 개인전

풍경은 마음의 산문이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 우리의 기억에 자리한 풍경은 마음의 펜 끝을 따라 따뜻하고도 아련한, 또 그립고도 쓸쓸한 산문을 풀어놓는다. 풍경은 그렇게 마음의 기록이 되고 추억이 되고 울림이 된다. 유신년의 타일 풍경이 무엇보다 마음의 산문으로 다가오는 것은 그런 상호연관 탓이다. 사각형 건물에 난 작은 사각형 창들과 낙서처럼 그어진 빗금의 창들, 거기에 더해진 풍부한 색채와 회화적인 붓질은 그의 타일들로 하여금 단순한 도시 풍경을 넘어 추억의 아득한 지평에 우리의 시선이 머물게 한다. 누군가 과거는 오래된 미래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미래는 새로운 과거일 것이다. 현재는 그 오래된 미래와 새로운 과거가 동거하는 곳이다. 이렇듯 오늘을 산다고 우리의 의식이 오늘에만 머무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오늘의 풍경을 본다고 지금 이 시간의 풍경만을 보는 것이 아니듯이. 오백 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본 옛 나그네는 과거의 영화와 미래의 낯섦을 함께 보았다. 유신년의 타일 풍경은 그렇게 오래된 미래와 새로운 과거를 오롯하게 간직하고 있다. 그의 풍경을 보노라면 그것은 마치 먼 기억 속 차창 밖으로 스치던 어느 소도시의 풍경이 되기도 하고, 먼 미래의 어느 날 은은한 추억에 잠겨 걸을 황혼의 도시 풍경이 되기도 한다. 기억 속의 풍경이든 소망 속의 풍경이든 이처럼 마음이 따뜻하게 물든 풍경은 우리에게 오래도록 잊을 수 없는 산문으로 남는다. 유신년의 마음 풍경이 특별히 인상적인 것은, 무엇보다 그것이 통상적인 회화의 형식이 아니라 타일의 형식으로 이뤄져 있다는 데 있다. 타일이란 흔히 알 듯 건축물의 내외장재로 쓰이는 자재이다. 거칠고 중성적인 골재를 가리고 거기에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덧칠하기 위해 쓰이는 타일. 그것이 울림이 큰 마음의 풍경화로 거듭날 때 우리는 마치 번데기에서 나비가 나오듯 뭔가 새로운 차원의 미학적 질서가 전개되는 것을 본다. 그 변화의 근거는, 이를테면 스테인드글래스가 처음에는 단순히 교회 창의 허전함을 달래기 위한 장식 목적에서 출발했으나 나중에는 천상의 빛을 인간의 시각으로 재현해낸 예술로 평가되듯이, 타일 또한 얼마든지 장식 목적을 넘어 영혼의 빛을 표현하는 예술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는 데 있다. 이 경우 타일이 보여주는 빛은 스테인드글래스와 같은 천상의 빛은 아닐지 모르나, 우리의 추억의 빛, 그리움의 빛, 마음의 빛이라는 점에서 천상의 빛 못지 않게 소중한 빛이다. 유신년은 그 빛의 근원을 함축적인 형태와 아름다운 색채의 풍경으로 찾아가고 있다. 그런 점에서 그의 타일이 자꾸 저 고딕 성당의 스테인드글래스를 연상시키는 것은 결코 낯설거나 이상한 일이 아니다. 풍경이 흐른다. 유신년의 풍경도 흐른다. 세월도 흐르고 마음도 흐른다. 이 세상에 고정된 것이 어디 있으랴. 풍경은 세상이 흐름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선명히 가르쳐주는 스승이다. 유신년의 풍경이 흘러 당도할 곳은 어디일까? 그곳은 아마도 모든 풍경의 원형이지 않을까? 사실 우리가 세상의 풍경을 보다가 곧잘 그리움에 잠기는 것도 그 근원의 세계가 그립기 때문일 것이다. 유신년의 타일 풍경에는 그 근원의 빛이 어른거린다. 디테일한 묘사가 어려운 타일의 한계가, 오히려 근원의 풍경을 더욱 선명히 부각시킨다. 볼수록 새삼스럽고도 오묘한 맛이 우러나오는 작품들이다. 이 주 헌 │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