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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정 개인전

지편(紙片)들의 유희와 의미 한국화가 이윤정의 그림을 본다는 것은 색다른 경험이다. 작가의 작업을 처음 대하면서 갖는 경험은 그림의 구조만큼이나 한 마디로 정리하기 어려운 점들이 있기 때문이다. 처음도 없고 끝도 없어 보이는 띠들이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 모습이 그리 단순치 않은 느낌들을 갖게 한다. 복잡한 듯하지만 단순해 보이기도 하고, 또한 무엇을 감고 있는 듯하다가도 오히려 어떤 결박에서 풀려 나오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갈등적인 듯도 하지만 화해적인 듯하고, 불안하고 서늘한 공기가 느껴지지만 그러면서도 낙관적인 광채가 화면 도처에 감돌고 있는 것이 아닌가. 띠들이 수없이 얽힌 작가의 그림은 이처럼 생경하고 모순적인 문맥과 플롯으로부터 출발한다. 그것이 작가의 치밀한 의도에서 그렇게 된 것인지 아니면 우연적인 결과인지 알 길은 없다. 다만 작가가 10년 넘게 작업의 과정을 통해 일관되게 동일한 모티브를 추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우연적인 것만은 결코 아님이 분명한 것 같다. 작가는 한지의 띠들을 안료에 적셔서 다시 종이에 찍어내는 과정을 여러 차례 반복시킴으로써 화면을 쌓아간다. 무수히 많은 모노타입의 판화들이 한 화면에 축적되는 것이다. 물에 대한 예민한 물리적 특성들이 찍히는 과정을 통해 예상치 못한 다양한 효과들을 보여주게 된다. 초현실주의자들의 다양한 방법들이 화면의 참신함을 줌과 동시에 우리 무의식 저 아래에 잠자고 있던 감성들을 다시 소환해 올리고 있는 것이다. 어떤 경우는 마치 피륙의 위사와 경사처럼, 어떤 경우는 무질서한 분자들의 유희처럼 그 지편들은 우연과 분방한 자유의 몸짓과 궤적들로 장식된다. 하나하나의 지편(紙片)들이 저마다 변화무쌍한 형태를 띠고 있는 것이나, 색감조차도 엄선된 주조색을 적절히 변화시켜가는 내용들이 전체적인 분위기를 조율하게 된다. 이러한 찍기 방법은 오랜 모필에 익숙해 있던 작가와 또 수용자 모두에게 의외의 해방감과 참신한 감각을 줄 만한 것이다. 심미적인 편안한 색조의 율동을 띤 이 지편들의 구성은 작가에게 상당히 중요한 근간이다. 거의 작가의 정체성을 대변해 주는 것이라 할만큼 밀도와 성취도 높은 내용을 이루고 있다. 물론 작가가 그동안 알 이미지나 띠 이미지들을 부가하는 등의 시도가 있었지만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작가가 변화시켜나가는, 그리고 끊임없이 변화를 시도해야 할 국지적 소재에 지나지 않는다. 작가가 긴 호흡과 선 굵은 작업을 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도 바로 자기다운 방법의 체계를 정립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오랜 방법의 천착 속에 공통적으로 발견되고 있는 중간색 톤은 역시 가장 작가다운 감성의 자연스럽고 행복한 표출임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유미적인 형식과 방법의 안정적 기조에 작가는 의외의 요소들을 부가한다. 바로 그려지거나 데코파쥬처럼 오려진 띠가 결합되는 것이다. 작가가 이전에 알 이미지를 삽입했던 것처럼 찍어낸 지편의 이미지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띠 이미지가 마치 결박하듯 조여오는 것이다. 이로써 평온했던 화면들은 배경의 효과로 밀리게 되고, 화면은 긴장과 갈등의 국면으로 전환된다. 그야말로 극적 반전이 아닐 수 없다. 바로 이러한 국면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어떤 이들은 온기를 지닌 생체에 차디찬 쇠사슬을 감는 것 같은 전율을 느꼈을 것이다. 물론 그 띠 이미지는 쇠사슬과 같은 무거운 이미지가 아니다. 라오콘 군상에서 칭칭 감고 있는 뱀 이미지처럼 목표물에 집착하는 정황도 엿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셀로판 같은 탄성을 지닌 것처럼 오히려 결박의 순간 반작용의 힘, 즉 풀려 나오는 힘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국면으로 보일 수도 있다. 이 대목에서 궁금증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조이는 것이든 혹은 풀리는 것이든, 왜 작가는 이러한 뜻밖의 부가적 요소에 의해 긴장과 반전의 화두를 던지고 있는가. 종전의 알 이미지를 결합시켰을 때와는 문맥 자체가 대단히 다르다. 작가의 노트를 엿보자면 작가는 이러한 정황을 ‘인연', ‘자화상' 등의 명제로 암시해 나가고 있다. 즉 자신의 내면에 대한 성찰이자 고백의 한 단면임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내면을 무언가 복잡한 얽힘의 것으로 서술하는 것이다. 작가 내면의 상황들을 다 헤아릴 수야 없겠지만, 작가 스스로 자신을 성찰할 때 모순적인 자아의 모습에 충분히 공감이 간다. 자신의 내면이라는 것으로 한정하였지만 독해하는 수용자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경험도 가능하다. 작가의 화면은 누가 보아도 복잡한 구조를 통해 그것이 시사하는 문맥을 연상해 나갈 수 있다. 이렇듯 복잡한 선들의 얽힘을 통해 작가 내면의 여러 가지 심리상황을 서술하게 된다면 그것은 일종의 알레고리라고도 할 수 있다. 열어 보일 수 없는 내면의 것에 대해 ‘띠'라는 가시적인 대상으로 서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것의 독해는 한정된 코드로만 안내되는 것이 아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다의적으로 혹은 동일한 대상을 통해 상반된 해석까지 가능한 열린 해석의 여지가 발견되고 있다. 작가가 편안하고 정감이 넘치는 화면을 긴장으로 몰아넣은 것은 작가 자신의 내면에 대한 서술일 수도 있지만 자신의 예술에 대한 고뇌에 대한 고백이기도 하지 않을까. 일상과는 또 다른 세계이자 자아의 또 다른 분신인 예술의 실재는 언제는 자아와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이 돈오(頓悟)처럼 다가온 것은 아닐까.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띠라는 이미지는 알레고리로 읽히기보다는 단순한 설명이나 묘사로 읽히기가 쉬울 것이다. 부분적으로 다소의 과한 작위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진지한 몰입과 겸허한 자기반성의 문맥들은 강한 인상을 남긴다. 특히 추상적 표현의 방법적 취약성을 보이고 있는 동양화 화단의 현실을 감안하면 작가의 조형적 실험들은 적지 않은 성취를 거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개성적이고 실험적인 방법과 공동체의 통시적이고 원형적인 미감을 조화시킨다는 것은 그리 쉬운 과제가 아닐 것이다. 우리 동양화 화단에서 현대성을 수용하는 데 있어서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상당히 의미가 있는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작가들의 일관성 있고 호흡이 긴 탐구와 예민한 조율을 통해 가능한 일이다. 이런 점에서 작가의 묵묵한 수행(修行)과도 같은 회화적 정진에서 바람직한 성취들이 기대된다고 믿는다. 물론 어떤 완성은 아닐 지라도 작가의 선이 굵은 조형적 수행들은 분명히 의미가 있는 일이며, 또한 기대를 갖게 한다. 이 재 언 (미술평론가)